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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시선으로 세계사를 즐기다, 버트런드 러셀

간만에 책이 읽고 싶어서 구매했던 도서다. 두껍지 않고 어려운 내용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통찰과 문장력은 늘 내게 영감을 준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또 다시 미뤄두었던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의 설명은 포에니 전쟁 이후의 이탈리아에 대한 서술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튜터 왕조 시대의 잉글랜드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우리 시대의 문인들 사이에는 한층 더 확산되었다. 캘리포니아에 대한 그런 유의 서술은 두 권의 두툼한 책 - 존 스타 백의 《분노의 포도》와 프랑크 노리의 《문어》 - 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론 역사가들이 그들이 다룬 시대의 악폐에 대해 한 말은 대개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시대가 더 나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종종 잘못된 추정으로 판명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이 등장하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 전문화의 소산이다. 특정 시대에 관해서는 소상히 알고 있으되 그 직전 시대에 대해 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일부 고착된 문학적 관습 때문에 자신이 친숙하게 여기고 있는 시대에서 발견되는 악폐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어떤 위대한 인물도 "초연"한 적이 없었다. 강조하거니와 결코 없었다. 물론 그들이 본원적인 용기 - 즉 자연이 오직 공포만을 가져다준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힘 - 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며, 범용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초연한 모습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는 보통 사람의 용기를 뛰어넘어야만 했으니, 이는 그들이 자연의 냉혹성과 인간의 잔인성을 한층 깊이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의 냉혹성과 잔인성을 편리하게 거짓으로 덮는 것은 비겁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위대한 인물은 그것들을 단호하고 투명하게 직시한다. 하지만 고상하게 생각하고 느낀다. 그것이 위인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모두 위대해질 수 있다는 전제에서, 이것은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성스러움은 예술적 우월성보다 판단하기가 더욱 어렵다. 위선자들이 역사 시대 전체를 일관해 방어적 모방 기법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성인일 경우에만 선을 행할 수 있는 조직은 오래지 않아 악을 행하기 시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성인이 매우 더디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 이것은 중요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