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의 상대성
2018년 가을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트레킹 여행을 다녀왔다. 트레킹의 목적지이자 반환점인 ABC를 앞둔 전날엔 해발 약 3700m에 있는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 짐을 풀었다. 체온 관리를 소홀히 한 탓인지 이른 저녁 식사를 한 뒤부터 열기운이 느껴져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 날 드디어 ABC에 도착한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한밤 중에 잠에서 깨서 한동안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옷을 챙겨입고 잠깐 바깥 바람을 쐬러 롯지를 나왔다. 인공광이라고는 없는 첩첩산중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쏟아지는 별빛뿐이었다.
이듬해 가을엔 하와이를 다녀왔다. 호놀룰루에서 와이키키식 관광을 이틀 경험하고 마우이 섬으로 건너갔다. 할레아칼라 전망대에서 보는 일출이 장관이라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전체 여행 일정을 빡빡하게 만듦에도 억지로 일정을 꾸겨넣었다. 새벽 3시쯤 렌터카에 시동을 걸고 구불구불한 밤 산길을 열심히 달렸다. 늦지 않게 도착한 전망대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나를 반겨준 것은 영롱한 밤하늘의 별들이었다. 일출을 볼 자리를 잡고 몇 번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높은 곳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경험은 정말이지 경외롭다. 우주 저 멀리에서 봤을 때 지구라는 행성의 지각은 거의 평평할 것이나 이 작은 행성에서 평생을 보내는 생명체의 입장에선 저 진공 너머의 별들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본다는 느낌 때문일까. 아니면 높은 곳이라는 지리적 위치가 필연적으로 가져다주는 도피의 느낌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도피해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우주는 평소 도시에서 올려다본 하늘보다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마치 우주를 마주하는 것이 도피의 목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상 저 빛나는 별들은 전혀 우리와 가까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이런 감상에 빠져 있는 순간에도 무서운 속도로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우주의 가속 팽창은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특정 거리보다 더 멀어져버린 은하는 광속보다도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어떤 천체가 광속보다 빠르게 멀어진다는 것은 지구에서는 다시 관측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우주는 끊임없이 커지고 있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우주 팽창에 따라 여러 천체가 초광속으로 멀어지는 것은 아주 거시적인 관점에서나 유효한 이야기긴 하지만, 우주의 이 특성을 고려하면 전 인류의 먼 우주로부터의 도피는 현재진행형이며 우주가 언젠간 팽창을 멈추고 수축을 시작할 것이라는 가설이 사실이 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진행 중일 것이다.
지구가 그렇게 무한한 도피에 빠져 있다 한들, 그 위에 발을 붙이고 사는 우리 인간들의 미시적 도피는 필요한 법이다. 작년 초에 짧은 도쿄 여행과 호치민 출장을 다녀온 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덮쳤고, 일상과는 단절된 외딴 곳에서 아득히 멀어져가는 별빛을 바라볼 시간을 갖기 어려운 시대가 찾아왔다. 머리에 고이 담아둔 그 압도적인 광경의 기억들을 오랜만에 꺼내어보며 머지 않아 찾아올 또 다른 도피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