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결 블로그 ✍️ 💻 📷 🍻

다 지나고서야 쓰는, 내가 옷 리폼하는 취미를 가지게 된 계기

약 1년에 걸친 긴 감량 계획을 세우니 부족한 유산소 운동량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이 되었다. 문득 빌라 1층에 세워둔, 먼지만 쌓여가던 내 소듕한 픽시가 생각났다. 지도 앱을 켜고 집에서 회사까지 자전거 길을 찾아봤다. 편한 길은 잠실새내에서 잠실한강공원으로 진입해 한남대교 남단으로 빠져 강남대로를 타고 강남역까지 가는 것이란다. 40분이면 도착한다고 했다. 기대가 되었다. 봄기운이 완연했던 2월의 어느 주말을 보내고는, 이 정도 날씨쯤부터 자전거를 타야 초여름쯤엔 더위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픽시는 너무 오래 방치해둔 탓에 타기에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긴 서울이 아닌가? 따릉이라고 해도 한강을 따라 강남까지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느꼈다. 돌이켜보면 바로 이 때 모든 것을 그만 두어야 했다.

월요일은 어쩌다 지나갔고 화요일이 되었다. 주말 날씨가 이상하게 따뜻했던 것이었는지 아침 공기는 제법 찼다. 집 근처 따릉이 대여소에 도착할 때서야 장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 세이브 포인트였는데 나는 여기서도 잘못되어가는 현실을 간과했다. 1시간 동안 따릉이를 대여했다. 한강까지 가는 길은 몇 차례 가본 적이 있어서 낯설지 않았다.

강바람은 매서웠다. 손가락이 금방 말은 안 듣는 수준으로 얼었지만 이미 한강까지 나와버렸으니 중간에 적당히 돌아갈 길도 없다는 생각에 직진했다. 강바람이 계속해서 세차게 몰아쳤다. 따릉이를 타니 상체를 아무리 낮춰도 드센 공기저항을 피할 수 없었다. 페달질을 힘껏 해도 뻗어가는 느낌이 안 났다. 체감상 웬만한 조깅보다 느렸다. 하지만 그만큼 허벅지로 전달되는 피로감은 상쾌했다. 그렇게 느릿느릿, 이렇게 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청담, 영동, 성수, 동호대교를 지나 드디어 한남대교 남단에 이르렀다.

경사진 램프를 타고 다리 위로 올라갔다. 다리의 힘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내려서 끌고 갔다. 지도 앱은 거기서부터 강남대로를 쭉 타고 가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인도는 저 한 30m 앞에서 끊겨 있었다. 설마 출근 시간대의 이 험난한 차도를 따릉이로 주파해야 한다는 것인가? 10초 정도 망설였지만 출근길 특유의 짜증과 난폭함을 드러내는 차들을 보면서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아마 이것이 이 날 내가 유일하게 내린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따릉이를 끌고 잠원동 방향으로 빠졌다. 골목길에서 잠시 멈추고 다시 지도 앱을 봤다. 이 길로 일단 접어들면 강남역까지는 꽤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일단 저기 앞까지만 가보기로 마음먹고 아이폰을 바람막이에 찔러넣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한 2, 3초 탔을까 무의식중에 오른손으로 오른쪽 주머니에 전화기가 잘 들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없었다. 어 그럼 왼쪽 주머니엔 넣었겠지 싶어서 오른손으로 왼쪽 주머니를 막 만지던 찰나에 갑자기 시야에 없던 급경사가 보였고 급한 나머지 꽝꽝 얼어 있던 왼손으로 풀브레이크를 당겼다. 내리막길에 들어선 자전거의 앞브레이크를 밟으면 어떻게 된다? 뒷바퀴가 들리면서 그대로 180도 뒤집힌다.

다행히도 거의 다치지 않았다. 안경도 날아갔는데 이상무. 경사에서 미끄러지면서 몸이 아스팔트에서 살짝 밀리는 느낌이 났기 때문에 옷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모두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출신임을 자랑하듯 제법 멀쩡했다. 자전거도 문제는 없었다. 무엇을 위해 오늘 이 고생을 한 뒤에 길에서 넘어졌어야 했나, 34살에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삶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후회와 한심함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따릉이의 대여 종료 시각과 출근 시각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슬랙에 30분 휴가를 쓰겠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급하게 따릉이를 몰고 근처의 대여소에 반납한 것이 정확히 대여한 지 1시간이 지난 때였다. 가로수길을 걸으면서 조금 신세 한탄을 하고 신사역 화장실에서 매무새를 가다듬고 씩씩하게 출근했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기능성 의류 전문 수선업체를 하나 찾았고 다음 날 오전에 택배 발송, 그 다음 날 수선 방식에 대해 짧은 통화를 하고 그 다음 주에 옷을 받았다. 세상에나 원래 이렇게 생산된 것처럼 뻔뻔하게 수선된 옷을 보면서 그래도 업체 하나는 기똥찬 곳을 찾았구나 생각했고 자전거에서 넘어진 2월 23일을 내가 옷 리폼하는 취미를 갖게 된 날로 기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