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빈지 워칭
입버릇처럼 하는 말 중에 '시리즈 물을 잘 안 본다’가 있다. 왜 안 보느냐? 일단 뭐라도 시작을 했으면 엔딩은 봐야 한다는 몹쓸 근성 덕에 여러모로 고통을 받게 되고 그 경험이 누적되면서 시작도 하기 전에 피로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참을 수 없는 덕후의 이데아 같은 것이 내면에서 꿈틀대 내 손가락을 이끌어 왓챠를 누르게 한다.
여름에는 이어즈&이어즈를 봤다. 재밌게 봤다. 이미 이 작품에 대해 떠든 사람들이 많을 것이므로(실제로 나도 그 누군가의 떠듦 때문에 보게 된 작품이었다.) 불필요한 말은 아낀다. 가을에는 진격의 거인을 3기까지 몰아봤다. 아직도 귀에 에렌과 미카사와 리바이 헨조의 이름이 이명처럼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제법 재밌게 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은 최종 시즌이 진행 중이라는데 그 어떤 스포도 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겨울에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라는, 가이낙스가 NHK로부터 의뢰를 받아 쥘 베른의 해저2만리를 원작으로 만든 TV 시리즈물을 봤다. 아직도 TV판이든 극장판이든 손 대지 않은, 그러나 어릴 적부터 꼭 보고 싶었던 에반게리온의 가이낙스라면 그래도 볼 만한 무언가를 만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열,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거의 폐급의 작품이다. 1990년에는 아마 꽤나 생소했을 법한 채식주의자를 비중 있는 등장인물로 내세운 초반부엔, 역시 환상의 뭔가를 보여줄 것 같다는 기대에 들떴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여기서부터는 환상의 뭔가는 없고 스포일러가 이어집니다. 조심해주세요.)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제작진이 그냥 채식주의에 시비를 걸기 위해 개연성도 핍진성도 없는 채식주의자 나디아를 만든 것 같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나디아의 채식주의자 정체성을 바보로 만든다. 그랑디스와 엘렉트라에 담긴 노골적인 여성혐오적 설정은 두 캐릭터의 등장 이후 작품의 마지막까지 개선이 없다. 정말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는 단체 목욕 장면, 스토리에 조금의 틈만 생기면 나오는 탈의 장면(또 그걸 훔쳐보는 남성 캐릭터는 빼놓지 않지), 샤워 장면 같은 걸 볼 때마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은 마음이 짜게 식었지만 몹쓸 근성이 나를 끝없는 고통으로 밀어넣었다. 화룡점정은 마지막 화인데 분명히 부녀 관계 정도의 나이 차이를 가진 등장인물 간의… 여기까지만 알아보기로 한다. 그래서 제 점수는요 0점은 주지 못해서 1점입니다. 왓챠의 평점을 쭉 살펴보니 마지막으로 1점짜리라 평한 작품은 알리타: 배틀 엔젤이었다. 오 생각해보니 두 작품이 평행 우주처럼 맞닿아 있는 지독한 지점이 분명히 있다. 여러분 2021년에는 모두 성공적인 빈지 워칭을 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