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을 헤치고, 아이리스 머독
1954년에 쓴 소설이라고 하는데 플롯의 구성이 꼭 락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로 대변되는 가이 리치 스타일(이라 적고 쿠엔틴 타란티노식 서사의 그늘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했다고 읽는다.)이었다.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유지하면서도 중간중간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지점들이 있어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독서 포인트를 어디에 두냐에 따라 치기 어린 남녀가 5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벌이는 일종의 활극으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에 가벼운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에게도, 철학 교수 출신의 작가가 써내려간 현학적 유희에 집중한다면 또 나름대로 무거운 주제들이 있어 그런 생각할 거리를 찾는 사람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당신이 매지와 결혼할 것을 작정하고 있었으니 말이오.” 하고 새미는 말하였다.
나는 숨을 크게 쉬었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매지와 결혼한다는 생각처럼 내 마음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배신처럼 생각되었다. – 내가 자기와 결혼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녀가 새미의 결심을 재촉하는 수단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지금에 있어선 더욱 그러했다.
나는 봉함엽서를 중앙우체국 벽에 수직으로 대놓고 애너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말 이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 말을 아주 서투른 글씨로 몇 번이나 썼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엽서를 봉했다.
하루 중에서 이때가 또 내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맘 때가 되면 상당한 피로감과 함께, 그때까지 거의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 즉 무엇인가 일을 하였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해 온 지적 노동은 내게 무엇인가 일을 했다는 성취감을 안겨다 주는 법이 잆었다. 해 놓은 일을 돌이켜 보면 빈 조개껍데기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지적 노동 자체의 성질에서 오는 것인지, 혹은 내가 무능해서 그런 것인지는 아직껏 판가름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