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카엘, 아모스 오즈
이스라엘 출신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는다. 배경이 되는 지역과 시대, 그리고 그 시공간 언저리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문화와 가치관이 모두 낯설다는 점에서 오는 신선함과, 작가 본인도 밝혔다는 러시아 문학으로부터의 영향, 그리고 화자인 한나가 시종일관 유지하는 이중적 정서가(이중적이면서도 불안정하게 양극으로 치닫는 그 광기!) 어우러져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고모님은 내가 미카엘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다고 비난했다. 미카엘은 남자가 아니라 헝겊인형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내게 진다고 책망했다. 그리고 야이르는 무례하고, 건방지고 멍청하다고 했다. 고모님이 떠나신 후에 나는 고모님 꿈을 꾸었는데 그 모습은 그 늙은 예루살렘의 유령들, 나이 들어 무기력한 떠돌이 행상들의 모습과 겹쳐졌다. 나는 젊어서 죽는 것이 두려웠고 늙어서 죽는 것도 두려웠다.
“잘못 알아들었군요, 미카엘.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게 끔찍한 게 아니라 당신이 당신 아버지처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게 끔찍한 거라구요. 그리고 당신 할아버지 잘만.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리 다음에는 야이르. 우리 모두가요. 인간이 계속해서 거부당하는 거잖아요. 계속해서 새로운 초안이 만들어지는데 결국은 다 거부되고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던져지고는 새롭고 약간 발전된 개작으로 대체되는 거죠. 이 모든 게 다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정말 무의미한 농담이죠”
위에 적은 짧은 평과는 무관하게, 보수적인 종교의 가치관이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기저에 깔린 사회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지 조금 엿볼 수 있는 대목들 역시 흥미로웠다. 2020년의 나의 가치관이 그에 동의를 하느냐의 여부는 완전히 차치해둔 평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말이에요, 그린바움 양, 전부 당신들이 성경에 나오는 우상숭배자들처럼 결혼하기 때문이에요. 처녀가 배경도 모르는 낯선 남자를 만나서 그 사람과 교제를 하고 세상에 자기 혼자라는 듯이 스스로 결혼 날짜를 잡다니요.” 타르노폴러 부인은 <처녀>라는 말을 하면서 지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또 그와도 무관하게 인상 깊었던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
마틸다는 방을 나갔다. 미카엘은 미안하지만 몇 분만 자기 논문을 좀 들여다보아야겠다고 했다. 나는 커피를 홀짝이면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건 그가 그러기를 바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채고는 조용한 만족감을 나타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란 얼마나 작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