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쿨렐레 에어라인
역시 여행의 참재미는 의도하지 않은 낯섦에서 오는 것 아니겠나. 기름을 가득 채운 렌터카를 반납하고 여느 때와 같이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끊은 티켓의 항공사 카운터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름부터가 낯선 모쿨렐레 항공사의 티켓을 들고 길을 물었다. 저어기 건물 뒷편으로 가서 다른 건물로 가란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공항의 모든 인프라를 뒤로 하고 가려니 나의 이성이 반사적으로 제동을 걸어 중간에 한 번 더 물어봤다. 절반 정도 왔으니 가던 대로 쭉 가란다. 갔다. 저기 뒤에 커뮤트 에어라인스라는 단어가 붙은 작은 건물이 보인다.
통근 항공사 비행기는 당연히 처음 타본다. 여기는 일단 수하물의 내용물 같은 것엔 관심이 없다. 캐리어를 무게만 달아서 가져가려고 하길래 내가 저 기내용 캐리어에 랩탑과 휴대용 배터리가 들었다고 하니 필요하면 꺼내가란다. 비행기가 작아서 기내에 수하물을 둘 곳이 없다는 말만 한다. 얘네를 그냥 위탁 수하물로 실으면 폭발의 위험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긴 했지만 일단 넘어가보기로 했다.
짐의 내용물엔 관심이 없던 이들이 오히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우리의 몸무게였다. 옆에 저울로 올라가란다. 그 작은 비행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해외 뉴스에서만 들어본, 체중에 따른 추가 요금 계산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유가 뭐가 되었든 하라는 대로 했다. 그 다음 절차를 기다렸다. 카운터의 직원과 우리 사이에 묘한 공기가 흘렀다. 음 이제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지?
뻘쭘한 분위기를 먼저 깬 것은 우리였다. 이제 뭘 하면 되나요?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여기? 그들이 말한 “여기”는 이천 버스 터미널의 대합실보다 초라한 공간이었다. 여기 앉아 있으면 되나요? 네 시간이 되면 당신들 이름을 불러줄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는데 이름을 불러준다고? 물론 인천공항에서도 뭔가 말썽을 일으키면 방송에서도 내 이름을 쩌렁쩌렁 불러주긴 하겠지만, 스타벅스 사이렌오더도 이용해보지 않은 나에겐 어쨌든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기”말고 저기 일반 공항 건물에 가서 뭐라도 사먹고 오겠다고 하고 자리를 잠시 떴다.
스타벅스에서 간단히 목을 축이고 이륙 30분 전에 “거기”로 돌아갔다. 티켓팅할 때 적혀 있던 이륙 시각은 오전 10시 45분. 그런데 오전 10시 45분이 넘어도 카운터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우리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이 사태(?)를 지켜봤다.
한 3분 정도가 더 흐르자 직원 한 명이 플라스틱 책받침에 끼워진 종이 한 장을 들고 다니면서 승객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어느 미국인 - 여기서 미국인이란 서로 대화를 할 때 영어를 사용하며 그 액센트에서 딱히 미국이 아닌 국적성을 느끼지 못하겠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 부부와 그들의 자녀 3명이 처음 호명된 승객들이었다. 그 다음은 어느 한국인 - 여기서 한국인이란 해외에서 보자마자 대번에 아 한국 사람들이네 하는 느낌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킨다 - 커플을 불렀다. 그 다음은 나와 K였다. 내가 손을 들자 직원은 친절하게 우리에게 다가와 3번 줄에 앉으면 된다고 했다. 세 번째 줄에 앉아라.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 제비뽑기를 했던 것은 고교 시절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후로는 처음 이런 방식으로 어떤 자리를 배정 받았던 것 같다. 여튼 호명은 거기까지였다. 미취학아동 3명과 성인 6명이 그 날 모쿨렐레 항공사의 마우이발 빅아일랜드행 승객의 전부였다.
비행기 탑승은 약 10m 정도의 도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건물 바로 뒷편 쇠창살 문을 여니까 이미 비행기가 대기를 하고 있었다. 프로펠러가 유난히 부각되는 그런 작은 비행기였다. 기장이 비행기로 오르는 이동식 계단에 서서 승객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했다. 당신은 상업용 비행기를 타면서 기장의 인사를 개인적으로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나는 받아봤다.
내부는 아주 단촐했다. 하나의 줄에는 좌측에 한 좌석, 우측에 한 좌석이 전부였고 그렇게 총 네 줄이 있었고 미국 사람들끼리 퍼스트 클래스 자리라며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던 맨 뒷 자리는 가운데 복도없이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퍼스트 클래스가 낯이 익었다. 즉시 구글링을 했다. 지난 호치민 출장시 비행기에서 보았던 키아누 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데스티네이션 웨딩>의 비행기 신을 찾았다. <데스티네이션 웨딩>은 B급 감성의 블랙 코미디로 영화는 별로 내 취향도 아니었고 재미도 없던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떠올렸던 그 장면 스크린샷 정면에 정확히 모쿨렐레 에어라인의 로고가 보이는 게 더 중요했다. 그 영화의 배경이 하와이였던가? 아니다. 모쿨렐레 에어라인은 미 서부에서도 몇몇 노선을 운영 중이었고 영화의 배경은 캘리포니아였다.
승객 9명과 기장, 부기장 총 11명이 탑승한 소형 비행기는 활주로로 나가는가 싶더니 곧바로 속력을 올려 이륙했다. 마치 신사역을 벗어난 택시가 올림픽대로를 타는 것과 같은 일상적이고도 간결한 루틴이었다. 비행기가 작다보니 조금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비행이었을뿐만 아니라 소형 비행기 특유의 저고도에서 바라보는 마우이의 연안과 해안선은 정말 절경이 아닐 수 없었다. 니콘EM의 셔터를 몇 번이고 눌렀다.
비행기는 코나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고 예상했듯이 일반적인 터미널이 아니었기 때문에 렌터카 회사에 전화해서 셔틀을 보내달라고 해야 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무척 유쾌했던 경험이었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