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행 예약
하와이에는 마우이라는 섬이 있고 마우이에는 할레아칼라라는 산이 있으며 그 정상은 일출을 보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미 네팔 트레킹으로 기초 체력을 쌓은 우리가 탐낼 만한 관광지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카메하메하의 유령은 그렇게 쉽게 일출의 경관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베트남 출장 때 짬을 내어 이번 여행 일정에 대해 타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예약을 마쳤다. 그 때 알게 된 정보 하나는 할레아칼라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에 차를 끌고 올라가려면 공식 웹사이트에서 미리 차량 예약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약을 시도했다. 내가 계획한 날짜는 선택이 안 된다. 구글링을 해봤다.
결론인즉, 오전 7시 이전에 칼레아할라에 차량을 가지고 가기 위한 예약은 2가지로 나뉘며 하나는 2개월 전부터 제한된 수량에 대해 온라인 예매, 나머지는 그걸 놓친 사람들을 위해 이틀 전부터 조금 풀리는 물량에 대한 예매였다. 두 달 전부터 예약 가능한 티켓은 이미 품절이었고 방문하려던 날짜의 이틀 전보다는 더 이전 시점에서 예약을 시도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선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온라인 예매라면 자신이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한국에서 예행 연습을 해볼까 했지만 또 열심히 구글링을 해본 결과 이틀 전 예약은 하와이 현지 시각 오전 7시에 오픈된다고 하여(이는 현 시점 한국의 오전 2시다.) 마음을 접었다. 나름 잔뼈가 굵은 내가 고작 하와이의 투어 프로그램 예약을 실패할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돌다리를 두들겨보고 건너고자 하와이 시각 10월 3일 오전 7시에 10월 5일 투어를 위한 예매를 시도했다. 어차피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수면 패턴이 엉망인지라 일어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맥북을 열었다. 크롬 한 탭에 네이비즘을 켜놓고 정각을 기다렸다. 때가 되었다. 잽싸게 탭을 옮겨와 새로고침을 한 번 누른 뒤 10월 5일을 선택했다. 표가 벌써 몇 장 나갔다. 하지만 원래 나보다 손이 빠른 녀석은 얼마든지 있다. 차분히 옵션을 고르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에러 페이지를 만났다.
에러야 날 수도 있다며 맘 편히 생각하고 뒤로 간 다음 다시 날짜를 고르려고 했는데 선택지는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매진이라고 한다. 총 5초가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서버 오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고침을 반복하면서 이게 오류라고는 없는, 생각한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치열한 예매 전장터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마 본게임에서도 실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잡했다. 카메하메하의 유령이 나를 보고 비웃고 있었다. 미리미리 챙겨서 예약하지 않은 자신을 책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으나 머리에는 온갖 상념이 가득했다. 패인은 무엇이었을까? 곤히 자고 있는 K에게 이 비보를 어떻게 전할까? 마우이에서 할 수 있는 일정엔 또 뭐가 있을까? 짧지 않은 뒤척임 끝에 다시 일어나 맥북 앞에 앉았다.
아무래도 패인은 새로고침에 있었다. 만약 해당 예약 시스템이 AJAX로 현황을 받아오는 방식이라면 새로고침 없이 원하는 날짜를 UI에서 선택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기타 예약에 필요한 정보를 다시 입력할 시간도 아낄 수 있다. 예매 웹사이트에 다시 접속해서 크롬 개발자 도구를 켜고 여러 경로에서 몇 가지 테스트를 했다. 다행히 가정은 맞았다. 여전히 불안하기는 했지만 용기가 조금 생겼다.
그리고 오늘 아침, 시차에 적응을 잘해버린 바람에 조금은 잠에서 덜 깬 상태로 맥북 앞에 앉아 예약 사이트에 접속했다. 저번과는 달리 아이폰으로 네이비즘을 켜놓고 정각을 기다렸다. 7시. 미리 리서치한 대로 페이지 새로고침을 하지 않고 달력 UI에서 원하는 날짜를 골랐다. 역시 예약이 가능한 상태였다. 자신있게 다음 버튼을 눌렀다. 운명의 동글뱅이가 빙글빙글 돌았다. 저번에도 여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이 이후에 뜨는 페이지가 무엇이냐가 중요했다. 하와이 군도를 지배했던 카메하메하 왕조를 떠올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네르기파. 베지터. 부르마. 트랭크스. 이내 페이지가 전환되었다.
성공했다. 약간 떨리는 손으로 카드 정보 등을 입력해서 예약을 마무리지었다. 처음 예약을 실패한 대상일이 토요일이라는 점이 다소 아웃라이어로서 작용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정상적으로 예매를 마치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을 때 전투는 끝나 있었다. 할레아칼라 일출 보고 싶으면 미리미리 예약을 신경 쓰라는 이야기다.
일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