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결 블로그 ✍️ 💻 📷 🍻

칼바도스

레마르크의 개선문은 자의로 2번 이상 읽은 몇 안 되는 책이다. 사실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고 이제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 정도를 빼고는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난다. 이제 와서 다시 읽으면 이런저런 불편한 지점이 있을 수도 있겠다. 현 시점에서 이 책에 대해 덧붙일 수 있는 코멘트는 아무 것도 없다. 확실한 것은 과거의 내가 이 소설을 무척 좋아했고 라비크는 당시까지 소설로 접한 모든 가상의 인물 중 최애캐였다는 것이다.

그 라비크보다 더욱 강렬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칼바도스라는 이름의 술이다. 칼.바.도.스. 이름부터가 개쩐다. 한 모금 넘기면 크 개맛있네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은 음절들이다. 개선문에서도 독주로 묘사가 되(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던 이 멋드러진 이름의 술은 오래 전부터 내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물론 주종의 이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2014년인가 압생트를 처음 먹었던 날을 기억한다. 끔찍하니까 더 기억하지 말기로 하자.

호치민 출장 마지막 날 인천행 비행기 이륙을 약 5시간 앞두고 소개 받은 바에 갔다. 위스키를 두 잔쯤 먹었을까, 갑자기 바텐더가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아직 해피아워니까 술을 더 시키란다. 털어버릴 현금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좀 쫄아 있던 것이 사실이었는데 티가 났나보다. 최대한 침착하게 메뉴를 쭉 훑었다. 그리고 나는 칼.바.도.스.를 발견하고 만다. 나는 라비크다. 여기는 파리다. 나는 고독하고 정체성 없는 나그네다. 나는 독주가 필요하다. 나는 칼바도스를 시켜야 한다. 잔뜩 상황에 감정이입하여 술 한 잔과 석화를 시켰다. 개선문의 라비크도 석화를 시켰던가?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보통의 술꾼들이 그렇듯 내겐 술을 더 먹을 명분이 필요했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