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용 선풍기
어딘가에서 말하기로는 10년쯤 전이라고는 했지만 다시 글을 적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언제쯤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길거리나 대중교통 등 공개되어 있는 공간에서 마이크 모듈이 달린 이어폰으로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이 쿨해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겁지도 거대하지도 않은 전화기를 손으로 직접 들고 통화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멀리서 보면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크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행동과 마음가짐의 원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이 근대적인 사고를 버리게 된 것은 2015년의 일로, 아이폰6에 번들로 딸려온 이어팟을 어쩔 수 없이 사용하면서 통화할 때 양손을 자유롭게 두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러다이트가 현대인으로 재탄생한 순간이었다.
최근 운동을 많이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운동을 하면서 몸집을 불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 전부터 많았던 땀이 꾸준히 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윗통수(?)부터 시작한 땀이 돌비 사운드마냥 머리통을 휘감으며 전방위적으로 흘러내리는 편인데 그 모습은 내가 보더라도 좋지 못하다.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해결책은 손수건이었다. K가 등산을 갈 때 매번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이 빨리 마르고 땀 흡수도 잘 된다며 추천했다. 두 번째로 추천 받은 것이 휴대용 선풍기였다. 휴대용 선풍기. 그간 공공 장소에서 휴대용 선풍기로 바람을 쐬는 사람들을 보며 느낀 감정은 10년 전 이어폰을 통해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느낀 "쿨하지 않음"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10년 전의 나였다면 거들떠 보지 않았을 선택지였겠지만…
나도 이제 30대가 되어 실용이라는 거대한 관념 앞에 쿨함 따위는 잘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았겠는가. 8월부터 출근 가방에 휴대용 선풍기를 챙겨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땀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되면 녀석을 꺼내들었다. 최대한 주변 사람에게 신경 쓰이지 않도록 선풍기와의 거리를 좁혀서 바람이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는 척하면서 위태로운 땀 구멍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렇게 한 이틀이 지나고 나서 나는 휴대용 선풍기가 없는 삶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휴대용 선풍기 처돌이로 다시 태어났다. 에어컨을 발명하여 인류를 구원한 윌리스 캐리어가 모세쯤 된다면 휴대용 선풍기를 보급형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전파한 무명씨는 여호수아쯤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세와 여호수아에 대한 나의 개념은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읽은 다소 조악한 퀄리티의 만화책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위 비유는 적절하지 못할 확률이 85%쯤 된다.) 다시는 문명의 이기를 "쿨하지 않음"과 같은 멍청한 이유로 무시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