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본 영화들
JFK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편에서는 총 세 편의 영화를 봤다. 첫 번째로 본 영화는 이미 인천에서 JFK로 떠나는 비행기에서 이름을 봤을 때부터 ‘올 때 봐야지’ 생각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야기를 다룬 <온 더 베이시스 오브 섹스>였다. 비행기에서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전만 해도 나는 이 영화가 한국에서 <나는 반대한다>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첫 영화를 다소간의 실망감과 함께 시청한 뒤 고른 영화는 저 유명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줄리아>였다.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제인 폰다와 프레드 진네만이라는 이름만 보고 선택한 이 영화는, 이제 와서 구글링을 해보니 제50회 아카데미에서 11개 부문에서 노미네이션되고 두 개의 조연상과 Adapted screenplay상(이단어를 우리말로 뭐라고 옮기는지 모르겠다.)을 받은 작품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제50회 아카데미에서 무슨 영화들이 상을 받았나 봤는데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은 우디 앨런의 <애니 홀>이 받았고 음향, 아트, 편집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조지 루카스의 <스타 워즈>가 휩쓸었다.) 다소 허술하고 세속적인 극작가 릴리안이 뚜렷한 동기나 계기가 없이, 명망 높은 집안의 장래가 촉망되는 손녀로서 어렸을 적부터의 우상인 줄리아에게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모습에서 이성 애인과 딸이라는 수단으로 위장한 동성애적 코드가 다분했다. 이 영화를 연출과 편집이 겨우 살린 모호한 플롯의 작품 정도로 보는 평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런 관점은 완벽한 오해이며 역설적으로 그 모호함이 두 주인공의 관계와 주제의식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치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은 해석이라고 본다. 내가 보기엔 조연이라는 이름을 주기에도 아까울 만큼 존재감이 없던 대시 해밀 역의 제이슨 로버즈가 남우조연상을 탔다는 것이 바로 이 시대착오적 오해의 방증이 아닐까.
이후 화면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지겨워서 더는 영화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나 비행 후반부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고, <어 프라이빗 워>라는 영화의 포스터에 마음이 끌려 남은 비행시간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샤를리즈 테론의 덴버 앤 딜라일라 프로덕션이 제작한, 담배 연기와 술, 포탄과 시체, 피와 눈물, 집념과 고뇌와 방황이 가득 담긴 이 전기적 영화를 통해 나는 마리 콜빈이라는 위대한 사람과 그 치열한 삶을 알게 되었다. “여성 서사” 같은 고리타분하면서 사라져야 할, 그러나 현재로선 그 비주류성 때문에라도 존재 의의가 있는 단어들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훌륭하다고 소개할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본 것이 아마 이번 뉴욕 여정의 전후를 통틀어 가장 나를 칭찬할 만한 선택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므로 엔간해선 노골적으로 뭔가를 추천하지 않는 제가 주저리주저리 끝에 여러분께 이 군더더기 없고 완성도 높은 영화를 추천합니다. 어디서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프로그램이 개편되기 전에 대한항공 비행편을 하나 끊으시고 탑승하자마자 “헐리우드 영화” 섹션의 <어 프라이빗 워>를 시청하십시오. 일단 제가 예고편은 링크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