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어나온 쌀
이것은 세상 쓸모없는 이야기다. 주말에 집에서 일을 하다가 이제 슬슬 쌀을 씻어야 저녁에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쓰고 그냥 일이 하기 싫었다고 읽으면 된다.) 쌀을 씻다가 문득 아무 생각없이 살면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마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어서 끄적이는 일기 같은 것이다. 경고는 이만큼이면 충분하니 본론으로 넘어가본다.
올 초에 산책을 하다가 동네 마트에 들렀다. 마침 집에 쌀이 떨어진 것을 떠올리고 쌀 코너에 갔는데 가장 작은 포장 단위인 3kg짜리 쌀들은 모두 “씻어나온” 제품들이었다. 이런 “씻어나온” 것들을 잘 신뢰하지 않는 어머니께서는 분명히 한 소리를 얹으셨겠지만 당시에 화장실이 급했던 나는 더 고민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쌀 한 봉지를 들고 나왔다. 물론 그냥 들고 나오진 않고 결제까지 마치고 들고 나왔다. 어쨌든 편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봉지 뒷면을 보니 이야기하는 뉘앙스가 ‘씻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정도가 아니라 ‘씻으면 더 맛이 없고 영양분도 떨어지니 씻지 마십시오’ 정도로 제품의 "씻어나옴"을 강조하고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이후 언젠가 종종 쌀에 같이 넣어먹던 이런저런 콩과 잡곡을 다 먹게 되었다. 이마트 쓱배송 장바구니에 쌓아둔 물건들이 4만원(배송비 무료를 위한 최소 구매 금액) 언저리인 것 같아 앱을 쓱쓱 넘기면서 잡곡을 골랐다. 적당한 용량에 적당한 구성인 제품이 눈에 띄었다. 심지어 불릴 필요가 없는 제품이라고 한다. 조리모드도 백미모드로 하면 된다고 써 있다. 밥솥을 직접 돌려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백미모드는 잡곡모드보다 20분 가량 적은 시간이 소요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약 35분만 있으면 잡곡밥을 먹을 수 있다니, 이것은 잡곡계의 혁명이었다. 예리한 독자들이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신뢰감과 편의성을 갖춘 이 두 제품은, 실제로 섞어서 밥을 지을 때는 상극의 조합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씻어나온 쌀은 씻을 필요는 없지만 불릴 필요는 있다. 반면 부드러운 잡곡은 가볍게 씻어야 하지만(봉지 뒷면에 그렇게 써 있다.) 불림시간은 0분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매뉴얼대로 내가 이 두 제품으로 쌀과 잡곡을 섞어 밥을 짓겠다면 씻어나온 쌀은 따로 불려놓고, 잡곡을 나중에 씻어서 불려놓은 쌀에 섞은 뒤 밥솥에 얹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귀찮음에서 해방되고자 다소 비싼 돈을 지불하고 이 제품들을 산 것인데, 각각의 궁합이 맞지 않으니 그 이점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왜 신은 “불려나온 쌀”이라든지, “씻어나온 잡곡”은 만들지 않은 것인가. (물론 제대로 찾아보진 않았다.)
여튼 잡곡은 적당히 씻고 쌀은 적당히 불렸다. 다시 일을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