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 트레킹 6 : 밤부
-
ABC에 오르기 전날 밤은 여러모로 저조했다. 저녁을 먹고 글을 쓰는데 갑자기 열이 좀 올랐고 그에 대한 응급처치를 하느라(몸에 핫팩을 붙이고 옷을 엄청나게 껴입고 두터운 동계 침낭이 들어가 담요까지 덮었다.) 예정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ABC에 대한 설렘과 몸살에 대한 걱정이 겹쳤는지 숙면에 들지도 못했다. 히말라야에서 밤에 할 것이 없으면 무엇을 하는가? 별을 보면 된다. 마차푸차레를 배경으로 수천 개의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넋을 놓고 카메라를 켰다. 갑자기 아이폰이 식당의 와이파이를 잡았는지 KB스타알림에서 보험료가 빠져나갔다는 푸시 알림을 띄웠다. 스타는 스타끼리 알아보는 건가. 갑자기 분위기 자동이체라 약간은 흥이 깨졌지만 기가 막힌 사진을 건졌다.
-
비교적 산소가 적은 곳에 이틀 남짓 있다보니 고산병 증세가 무엇인지 조금 알겠더라. 내 경우 가장 특징적이었던 증상은 뭐랄까, 머리가 멍해지면서 정신과 육체가 조금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걷고 있고 내가 말하고 있는데 “조금 다른” 사람이 걷거나 말한다고 표현하면 비슷할까? 흥미로운 점은 그 느낌이 단순히 정성적인 것이 아니라 고도에 따라 정량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해발 4100m가 조금 넘는 ABC에서 한화 6000원 상당의 신라면을 먹을 때만 해도 한 5cm는 벌어져 있었던 것 같은 그 거리감은 해발 3100m쯤의 데우랄리에선 약 3cm로 줄더니 해발 2000m 중반대 아래부턴 0이 되었다.
-
확실히 올라갈 때 마음과 환경은 내려갈 때의 그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내려갈 때는 더욱 추워질 일이 없으니 옷차림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MBC에서 열이 났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땀은 나는데 공기가 무척 차갑기 때문에 겉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숨이 차지 않아 쉬지 않고 갈 수 있어서 속도에서 큰 차이가 난다 같은 단순한 물리적 이점은 차치하자. 하산길에서 우리의 역방향, 즉 이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만나면 불가피하게 오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적절한 비유라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훈련소에서 주차수(?) 낮은 훈련중대를 마주치는 느낌. 우리는 끝났다 ABC… 올라갈 때는 한없이 착한 동반자이자 조력자였던 비커스 역시 내려갈 때는 기깔나는 레이밴 선글라스를 끼고는 마치 “히말라야의 폭군” 같은 별명을 가진 사람처럼 무자비한 속도로 우리를 이끌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나 위대하다.
-
올라왔던 길과 같은 길을 내려가며 우리는 쉽게 과거의 우리를 타자화했다. 이렇게 가파른 언덕길을 어떻게 올라왔냐는 둥, 올라올 때 정말 힘들게 올라왔겠다는 둥 이야기를 하면서 실제로 어떻게 올라왔는지, 얼마나 힘들게 올라왔는지, 아니 이런 길을 정말 올라오긴 했는지 기억을 못한다. 힘든 기억은 금방 잊는다는 게 진짜인가보다. ABC 트레킹의 기억은 이렇게 미화되겠구나. 제가 나중에 어디가서 트레킹 안 힘들었다거나 할 만했다고 말하면 다 거짓말입니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