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크랜드 크루넥 티
인간이란 어리석은 동물이라 처음 이사 올 때만 해도 더 넓어진 공간을 되도록 넉넉하게 쓰자는 마음은 어느새 지나간 계절처럼 잊어버리고 내 작은 집은 이런 저런 물건들로 더욱 좁아지고 있다. 물론 여기엔 본래 나의 것이 아니나 네팔 산행을 위해 여기저기에서 빌린 외지의 물건들이 한몫하고 있으나 내 마음은 왠지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의 그것처럼 자책감에 가까워져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지난 몇 달간 꽤나 잘 지킨 것은 있다. (역시 트레킹 관련한 것을 빼고) 몸에 걸치는 물건 일체를 거의 구매하지 않은 것이다. 내 옷장이 저렇게까지 차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까지의 트라이얼 기간이 끝나면 많은 옷들이 내 옷장을 벗어나 어딘가로 빠져나갈 것이다.
새 옷에 대한 이 철벽 방어는 급기야 흰 색 무지 티셔츠를 기워 입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부천의 황태자 K가 청송산오징어에서 선물로 준 이 커크랜드 라지사이즈 티셔츠는 실로 놀라운 퀄리티의 제품인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거나 영영 하지 않기로 하고, 어쨌든 세트 중 하나는 품질불량인지 목 오른쪽의 실밥이 금방 터지고 말았다. 일련의 활동들이 새로운 소비로 이어지지 않게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제 기능을 하고 있는 무언가를 쉽게 버리지 않는 것. 신기에 가까운 바느질 솜씨로 터진 부위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하지만 이 물샐 틈 없는 바느질은 엉뚱하게도 사랑하는 K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보다 못한 그녀가 더욱 깔끔하게 재수선해주었다. 그러니까 나는 티셔츠도 구했고 아끼는 사람에게 뜻밖의 즐거움(+ 가사노동)도 주는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행복한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