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예수 그리스도는 야박하고 엄한 주인이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의 자잘한 허물을 이해하시고, 한심하게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이해하시며, 이 세상의 유혹을 이해하셨다. 우리는 유혹을 받았을 수도 있고, 어쩌다 한 번씩은 모두가 유혹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허물이 있을 수도 있고, 또 모두가 허물이 있었다. 그러나 신부가 회중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은 딱 한 가지라고 했다. 다름 아니라,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당당하라는 것이었다. 대차대조표가 모든 항목에서 맞아떨어지면 이렇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자, 내 대차대조표를 확인했다. 모두 제대로야.” 그러나 행여 대차대조표가 맞지 않으면 진실을 인정할 것이며 솔직히 남자답게 말하라는 것이었다. “자, 내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잘못돼 있고 이것도 잘못돼 있네. 하지만 하느님이 굽어살피신다면, 이것도 바로잡고 이것도 바로잡으리라. 내 대차대조표를 바로잡으리라.”
훨씬 더 애틋한 기쁨의 물결이 게이브리얼의 가슴에서 빠져 나와 동맥을 따라 뜨겁게 넘쳐흘렀다. 아스라이 쏟아지는 별처럼, 둘이서 함께 보낸 삶의 순간들이,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순간들이 기억 위에 환하게 펼쳐졌다. 아내에게 그 순간들을 상기시키고 싶어서, 아내로 하여금 둘이 함께한 시간 중 무미건조한 세월은 잊어버리고 환희의 순간만을 기억하도록 만들고 싶어서, 애가 탔다. 그 세월 동안에 자신이나 아내의 영혼이 메마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신은 글을 쓰고, 아내는 집안일을 돌보는 동안 둘의 영혼에 피어난 그 모든 애틋한 불길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게이브리얼은 이렇게 말했었다. ‘이런 말들이 나한테 이토록 따분하고 차갑게 보이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 당신의 이름이 될 수 있을 만큼 애틋한 단어가 없는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