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결 블로그 ✍️ 💻 📷 🍻

초상화

자고로 숫자라는 것은 범우주적으로 보편타당하고 덧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이 갖는 의미란 지구라는 일개 행성에 잠시 나타났다가 스러져가는 인간 종족의 한낱 말장난질에 불과할 뿐이기 마련이지만, 인간이란 자고로 한심하고 끝없는 실수를 반복하는 특성을 가지기에 굳이 옛날 이야기를 하나 꺼내오자면, 내가 나고 자란 뒤 숫자로 평가 받던 시절인 고등학교 3 학년 당시 모의고사로 가장 높은 성적을 받았을 때의 전국 단위 백분율이 0.1% 근처였더랬다. 그 성적표를 받아든 나는 이제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더 이룰 것은 없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하산의 의미로 더 이상 머리에 새로운 지식을 쌓지 않았다. 더 준비를 해서 집에서 가까운 연세대 의대를 가라던 담임의 이야기를 무시, 기왕 공대를 갈 거라면 서울대를 가라던 담임의 2 차 이야기도 무시한 나는 집을 떠나기 위한 일념 하나로 대전으로 떠났고 그렇게 나의 무시무시함은 내 삶에 큰 복수를 하게 되는데…

뒷이야기는 각설하고, 생각보다 대학교(또는 기술원) 이후의 삶에서 나를 그렇게 엄격하게 숫자로 재단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학부 과정 동안 GPA 니 하는 것이 있었고 각종 고시나 또 다른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에겐 어떤 시험의 점수니 등수니 하는 것이 왕왕 화제에 오르긴 했지만 적당히 놀면서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군대 다녀와서 적당히 취업한 삶에 그렇게 노골적으로 숫자가 끼어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취업한 이후의 삶에서야 연봉이니 재산이니 수익률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가끔 나오기는 하지만 이젠 그런 것에 잘 연연하지 않게 되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것들이 삶에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는 것인지 별 감흥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없었다. 바로 이 미친 선물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주변에 정신이 이세계(異世界)에 가 있기로는 손에 꼽을 수 있는 이상한 친구 K 와 P 가 합심하여 사준 나의 집들이 선물은 무려 나의 그림이다. 나를 지나치게 호리호리하게 묘사해서 이게 캐리커처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의 이 묘한 그림은 보면 볼수록 관객으로 하여금 불쾌한 감상에 젖게 하는데, 그 느낌이야말로 이 그림의 백미라고 생각한 나는 거실에서 눈에 제일 잘 띄는 자리에 그림을 놓았다. 그냥 덩그러니 있으면 너무 애니메이션 <코코>에 등장하는 제단을 연상시켜 앞과 옆에 뭐라도 좀 놓았다. 그러니까 그나마 좀 낫다.

서두에 재미없는 숫자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이 그림 때문이다. 분리형 원룸 거실에 이렇게 묘한 바이브를 주는, 본인을 그린 그림을 놓고 사는 사람은 전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단언컨대 0.1% 안짝이라고 생각한다. 도무지 제대로 된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는 K 와 P 덕에 나는 이렇게 또 한 번 19 살의 나를 뛰어넘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지만 또 받고 나면 괜히 버리기는 찝찝한 선물을 궁리하고 계신 여러분들께 강력하게 초상화 선물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