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다운
아래는 일요일 밤에 일어난 일로, 형 전화기의 인스타그램으로 로그인해 남긴 글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현관문 시건과 관련된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잤고, 형이 차려준 아침을 먹고 혼자 우두커니 거실에 앉아서 TV 를 좀 보다가 사당으로 돌아가 마스터키로 연 뒤로 별 이유없이 정상 동작하는 도어락을 확인하고 씻고 잘 출근했다.
그리고 왠지 기분이다 싶어서 출근길에 로또를 샀다. 다음 주부터 이 주의 소비 같은 것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런 줄 아세요.
자기 전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쓰레기를 잘 버리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 도어락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내며 열리지 않는다. 어라. 주머니를 곧바로 만졌으나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당연하다. 나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온 사람이었고 청바지, 반팔에 슬리퍼를 신은 것 말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연인이었다.
1 층 주차장 관리실에 가서 도움을 청했다. 주차장 관리인은 자기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관리소장 번호를 알려주며 연락을 해보라고 했다. 실로 오랜만에 “전화기”의 다이얼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의 소장은 내일 아침까진 할 수 있는 게 없고 9V 배터리로 바깥에서 전원 공급을 해보라는 이야기를 했다. 전화를 끊고 집 앞 편의점 직원에게 사정을 이야기 한 뒤 외상으로 배터리를 사서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나름 고등교육을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공학사 학위를 받은 사람의 이성으로 가능해보이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으나 도어락은 철옹성이었다. 이 때쯤 나는 (심한 욕) 같은 상황이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지금의 내 상황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직원에게(주차장 관리실은 그 사이에 닫아버렸다.) 전화기를 한 번 쓸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말했다. 택시를 타고 오면 자기가 근처에 서 있다가 대금을 치러주겠다고 했다. 편의점 직원에겐 내일 오전에 어떻게든 배터리 값을 내겠다고 했다.
슬리퍼를 찍찍 끌고 봄 밤의 한기를 맨 팔에 양껏 느끼며 택시를 타러 갔다. 이상한 손님인 것을 한 눈에 알아봤을 기사는 묵묵하게 목적지까지 운전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형을 발견했다. 인생의 은인이다. 후광이 보였다. 메타포가 아니라 진짜 후광이다.
형수님께 머리를 긁적이며 상황 설명을 했다. 형은 맥주를 꺼내줬다. 자기 전화기도 빌려줬다. PC 로 메신저에 로그인하려고 했으나 모두 모바일 인증을 요구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연락이 필요한 지인들에게 작금의 망함을 전달하긴 했다.
사진의 별 의미없는 물건들은, 형이 준 비상금을 제외하고, 지금 내가 수중에 가진 모든 것이다. 저 쓰레기를 손에 쥐고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쓰레기 한 번 버리러 나왔다가 형 집까지 택시 타고 가서 맥주도 먹고 잠도 자고 다시 출근 준비를 하러 집에 가다니, 형제 간의 우애가 깊어도 이렇게 깊을 수가 없다. 각설하고 망했습니다. 세상에 사람에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심하게 망하기도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따뜻한 곳에 몸 뉘일 곳을 마련한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내일 오전까지 연락이 잘 안 될 것입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그럼 즐거운 일요일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