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2016년 겨울 압구정의 술자리는, 워낙 혼돈의 술자리가 일상이었던 내게는 상대적으로 적은 충격으로 다가왔다면 일상에 배즙을 끼고 사는 I의 주(酒) 인생에서는 손꼽히는 n번의 술자리 중 하나였을 만큼 술을 부어댔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맥락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책에 대한 레퍼런스가 나왔고 나는 언젠가 이 책을 읽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비교적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이 책을 읽지 못하던 나는 그 후 약 1년이 지나 다른 사람 J에게 이 책을 가리키는 레퍼런스를 듣게 되었고 곧장 알라딘에서 중고 서적을 구해 읽어내려갔다. 굳이 사연이 있기에 그냥 적어두는 것이지 위 에피소드가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 힙스터라면 이미 한 번쯤 읽어봤을 정도로 출간된 지 수 년이 되어가는 책인 만큼, <피로사회>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 피로사회라는 구조 자체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우리들에게는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식상함은, 이 사회가 흘러온 역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 다뤄질 담론을 무려 2010년에 지적해낸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의 방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한 레퍼런스에 대한 이해 없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요 논지는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고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실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술술 읽히는 편이다. 분량도 길지 않으니 피로사회 또는 한병철에 대한 원문 레퍼런스가 필요하다면 부담없이 도전하는 것을 추천.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제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르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등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상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