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여행기3: 프로 스포츠 팀의 팬이 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어릴 적부터 스포츠 중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최초의 기억은 유치원을 다니던 때에 보던 국내 프로야구다. 당시 맹타를 휘두르던 김성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사실 그 때는 야구라는 운동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브라운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후 나는 종목과 국경을 넘나들며 스포츠에 대한 관심사를 넓혀나갔다. 서장훈과 우지원의 연세대를 응원했던 농구대잔치, 장종훈에서 시작해 이승엽으로 팬심을 옯겨 보던 프로야구, 피파 97과 98년 월드컵의 콤보로 이어진 국대 축구에의 관심, 신진식과 김세진이 씹어먹던 배구리그, NBA Live 2003, MVP Baseball 2003, FM 2005, Madden NFL 2005로 시작된 해외의 최정상급 프로 스포츠에 대한 동경까지, 삶의 대부분을 스포츠 중계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 내가 응원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프로 스포츠 팀은 KBO의 NC 다이노스, MLB의 탬파베이 레이스, 그리고 프리미어 리그의 첼시 FC다. 야구와 축구를 고루 좋아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저 세 팀이 갖는 공통적인 맥락은 거의 없다. 탬파베이 레이스는 MVP Baseball 2003을 열심히 플레이하던 시절 꼴찌팀을 골라하다보니 묘한 정이 들어버린 팀이고 NC 다이노스 경기를 보게 된 것은 야구에 대한 관심과 지인의 근무지가 어우러진 우연함의 산물이며 첼시는 국빠들의 성지 맹구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팀이던 시절에 팬이 된 것으로 이는 다시 말해 태생적으로 어떤 반대급부만을 위한 관심이라는 점에서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조를 해체한 이단아적 성격을 지닌다. 이렇게 경로가 다양하듯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겠지만 지금 슬쩍 생각해봤을 때 내 기준에서 저 세 팀의 공통점은 파란색 계열의 팀 컬러를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홈 경기를 직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방송망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최첨단 발현체인 프로 스포츠를 시간과 지역에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지 꽤 되었지만, 여전히 육감을 통한 직접 경험만큼 나와 스포츠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는데 도움이 되는 수단은 단연코 없다. 여러 카메라 앵글과 리플레이, 분석 등이 어우러진 TV 중계가 쾌적하게 많은 정보를 제공할지는 몰라도 직관이 주는 현장감과 UX, 구단이 제공하는 각종 팬 서비스, 응원의 에너지, 여운 등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본다.
긴 서론을 마치고 짧은 본론으로 들어가면, 지난 런던 여행에서 경험한 스탬포드 브릿지에서의 첼시 FC 홈 경기 직관은 내가 거의 일평생 영위해온 스포츠 관람의 역사를 통채로 부정해버릴 만한 임팩트를 가져왔다. 물론 내가 접한 것이 세계 최정상급의 구단 운용과 그에 상응하는 팬덤, 당시까지만 해도 가장 강력한 리그 우승 후보들의 시즌 첫 맞대결이라는 점(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티켓값…)을 참작해야겠지만, 그럼에도 거칠게 말해서 나는 직관 없는 팬덤은 사실상 죽은 스포츠를 보는 것과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채널로 풀어낸 프리미어 리그 구단 운용의 묘, 막강한 팬 문화에 대한 나만의 시각을 불필요하게 상술하지 않겠다. 지역과 구장이라는 물리적 한계성을 부정할 수 없는 프로 스포츠의 세계관에서, 지역은 곧 삶의 터전이고 스포츠는 그 삶의 한 축을 이루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이는 구단과 팬이 지역을 매개로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이끌어낸다. 바로 이런 거대하고도 타고난 운명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대체로) 무조건적인 공감대 없이 어느 프로 스포츠 팀의 팬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아쉬운 일이라는 말이다.
2018년에는 홈 팀의 팬의 입장으로 잠실 야구장을 찾아볼까 하는 계획이 있다. 과거의 성적을 보자면 역시 베어스가 편한 선택이겠지만 최근 구단의 움직임이 좀 불안해보이기도 하고 역시 유니폼은 핀스트라이프와 유광잠바니까 트윈스인가 싶기도 하고 모르겠다. 애초에 개크보판에 발을 들이는 것이 좀 망설여지기도 하고.
물론 이 모든 비교적 오버스러운 내러티브는 스포츠의 팬이 아니라면 성립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