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계곡의 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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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장에도 쓰고 그렸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그래도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그럭저럭 잘 따라나서던 초등학교 저학년쯤까지는 진관사라는 사찰 근처의 계곡에 여름마다 놀러갔던 것 같다. 흐린 기억을 열심히 반추해보면 꽤나 조용하고 한적하게 일상적인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좋았던 곳이다. 그 시절에는 부모님의 빨간 르망을 타고 오갔을 그 곳을 찾아보니 은평구의 북쪽 끝자락에 있더라. 계곡 사진을 찾아보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묘하다. 물에서 노는 것을 퍽 좋아하던 꼬마 이한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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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송사리처럼 지나쳐가는 기억들을 넘기고 나면 중학교 때의 기억이 강하다. 여름철에 두 해 연속인가 강원도 어딘가 폐분교가 있는 곳으로 자연이니 오지니 하는 키워드가 달린 캠프 같은 것을 갔다. 아주 맑고 차가운 물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안에서 십수명에 달하는 미꾸라지 같은 녀석들이 놀아댔으니 자연이니 오지니 하는 키워드가 다 무슨 소용이었겠냐마는 글을 쓰다보니 갑자기 그 곳에서 만났던 나보다 한 살 적었던 여자애가 내 이메일 주소를 물어갔던 게 생각난다. 이름도 모르겠는 친구야 이십대의 아홉수는 잘 보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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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 학년 때 배론 성지라는 곳에 갔다. 그 당시에는 배론이라고 하면 꼭 영화 메멘토의 테디 역할을 맡은 배우와 흡사하게 생긴, 전형적인 2000 년대 초중반의 킥 좋은 플레이메이커 후안 세바스찬 베론밖에 몰랐더랬다. 헛소리를 끼워넣은 이유는 단 하나로 도저히 그 곳에서 2 박이나 했음에도 뭘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곡이 근처에 있었고 나의 흥 많은 대원외고 동기들이 계곡물에서 열심히 놀았던 반면 나는 물가를 멀리했던 기억은 난다. 찾아보니 배론은 아르헨티나 축구 선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배를 닮은 동네 모양을 딴 이름이며 조선 말기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지내던 교우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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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을 앞둔 2012 년 여름 내가 한 때 회장 노릇을 하던 카이스트 전자과 밴드에서 여름 MT 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으로 펼쳐진 것은 쓸쓸한 복학생 생활뿐만이라고 생각했던 내겐 놓칠 수 없는 기회였고 동기들의 적잖은 핀잔을 냠냠 삼키며 10 학번, 11 학번 기수가 가는 MT 에 07 학번으로서 출사표를 내밀었다. 생각해보면 그걸 거절하기도 힘들었을 그 당시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며, 여튼 당시 회장이었던 Y 를 따라 정말 이상한 산행을 하다가 정말 어정쩡한 무슨 이상한 길가 옆에서 계곡욕을 즐겼다. 물론 나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페이스북 사진 앨범 피드를 쭉쭉 넘기다보면 그 때의 사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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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급번개 스타일로 관악산 계곡을 찾았다. 토요일 밤부터 비가 무진장 내려서인지 일요일 오전에 가게 주인으로부터 오늘 진짜 올 거냐고 확인 전화까지 받았을 만큼 계곡가에서 무얼하기에 썩 기분이 나는 날씨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고 백숙은 백숙이었다. 닭과 오리는 맛있었고 도토리묵과 더덕 무침을 곁들인 감자전은 그저 그랬는데 무엇보다 그렇게 계곡자락에 위치한 음식점들의 대부분이 불법 영업을 하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처음 알고는 크게 놀라 소주를 먹고 맥주를 먹었고 역시 맛있었다. 내가 찾았던 불법 영업 업소는 과천 방면에 돌담집이라는 곳으로 조심하세요 오전에 가니까 몸에 그림 그린 큰 형님들 여럿이서 놀고 계셔서 좀 덥고 습했는데 바람막이 못 벗었다고요. 형님들 떠나고 나서야 겨우 눈치 보며 반팔을 입었더랬습니다.
이상 계곡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