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전개 과정 속에서 지독하게도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가 가지고 있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오로지 작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 그 자체에만 집중하게끔 만든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나는 그야말로 모래에 흠뻑 젖어 있는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몰입도가 강했다는 방증이겠다. 흡사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을 보고나서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시간은 뱀의 뱃살처럼, 깊은 주름을 그리며 몇 겹으로 접혀 있었다. 그 하나 하나에 들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더구나 그 주름 하나마다, 모든 형태의 의혹이 제각각의 무기를 숨기고 있다. 그 의혹과 논쟁하고 묵살하고 또는 돌파하여 나아가려면 어지간한 노력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