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의 꿈과 옛날 이야기
간밤에 꿈을 꿨다. 지인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어떤 남자와 시비가 붙는 내용이었다. 뜬금없는 내용 같아 보이지만 나름 맥락이 있는 꿈이었다 할 수 있다.
어제는 얼마 전에 스팀에서 지른 바이오쇼크2를 조금 하고 집에 가려다가 갑자기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망측한 기분이 들어 두 가지 일을 조금씩 하려니 자연스레 퇴근이 늦어졌다. 역삼에서 신촌까지 지하철을 타고 신촌역 근처에서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에 올랐다. 불현듯이 고등학교 2학년인지 3학년인지의 일이 생각났다.
그 날도 비슷한 시각이었을 것이다. 어제와 같이 신촌역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버스에 탔다. 잘나가는 고딩답게 버스 뒷자리에 앉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어떤 여자와 어떤 남자가 탔다. 어떤 남자는 어떤 여자에게 집요하게 연락처를 요구했는데 대화의 맥락을 보니 두 사람은 오늘 말고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고, 여자는 어지간히 연락처를 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저런 것이 20대의 치정인가, 역시 삶은 부질없는 것이다라고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가면 갈수록 남자의 감정 상태가 거칠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처음에는 나름 존대를 하더니 나중에는 자기가 학교 선배라는 헛소리일 확률이 99%인 이야기를 하고 어조도 부탁? 애걸?조에서 협박조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거기서 고민을 많이 했다. 잘은 모르지만 외모로 보는 선입견에 의존하자면 그 남자는 교복을 입고 있는 나 같은 인간이 가서 한 소리만 하더라도 조용해질 것만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스에는 나보다는 훨씬 더 무게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하나가 먼저 나서리라 생각했다. 버스가 연대 앞을 벗어나 연희로로 접어들 때까지도 나를 포함한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여자가 (그 남자와 함께) 내린 것이 나보다 먼전지, 나중인지, 같은 곳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나도 그렇고 나머지 사람들도 그렇고 끝까지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눈 앞의 사태에 대해 당위성을 느낀 사람은 그 열서너명의 사람들 중 나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었을 수도 있고. 뒷일은 나도 모른다.
어제 갑자기 그 일이 기억났다. 나의 지난 밤 꿈은 이 기억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로서의 작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꿈에서 나는 곤란해하는 지인을 적극적으로 챙겨줬을 뿐만 아니라 (여느 개꿈이 그렇듯) 꿈 특유의 허우적거리는 주먹질을 그 상대와 주고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악한을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여느 페이스북 포스트가 그렇듯 뚜렷한 결론은 없다. 대상이 지인이든 아니든, 추근덕대는 상황이든 아니면 다른 곤란한 상황이든, 부당하게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목격했을 때 그 상황에 개입할 수도 있고 여전히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의 내가 그 옛날 서대문 03번 마을버스에 타고 있었더라면 분명히 한 마디를 던졌을 거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나저나 얼마 안 되게 느껴지는 그 일이 벌써 10년 전 일이라니 과연 광음여류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