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페이 여행기 9 : 조갯국이 기가 막히게 맛있는 곳, 지우펀
누가 봐도 관광지라고 알 만큼 날이 꽤 늦었음에도 불구하고(다시 말해 바로 당장 타이페이로 돌아간다고 해도 꽤 늦은) 대만 현지인,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깔끔한 공중 화장실에 들러 쿨스카프에 다시 냉기를 보급하고 본격적인 지우펀 탐방에 들어갔다. 월요일 저녁 7시, 인간이 가장 부담감을 가지지 않고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우펀 또한 서사적인 진행보다는 느꼈던 점들만 포인트성으로 집어내는 것이 더 좋다는 판단이 든다. 생각보다는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가 나오기 어려운 관광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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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인 탓인지 보통 사람들과 늦음에 대한 관념이 달라서인지 나와 P가 도착했던 월요일 저녁 7시 무렵만 해도 상당히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있었다. 지우펀 야시장 거리로 진입할 때만 해도 약 절반 정도의 가게가 문을 닫았고 그 동네에서 나오던 9시쯤에는 거의 90% 이상의 가게가 문을 닫았었다. 주말에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많은 점포가 늦게까지 영업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여하튼 사람들이 좀 더 북적이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가게들을 불을 밝히고 장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조금 일찍 지우펀에 도착해 동네를 둘러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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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관광객들이 비율상 가장 많은 곳이었다. 해외 여행의 묘미를 스스로의 타자화에서 찾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까지 추천하고 싶은 관광지는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대만이나 타이페이라는 관광지 자체가 대단히 이국적인 곳은 아닌 덕인지 한국 사람들을 알아보고 반가워하고 이야기하는 문화는 없었다.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이상한 소리나 안 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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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기는 했지만 지우펀이 자랑하는 홍등가는 참으로 볼 만한 광경이었다. 혹시나 지우펀에 익숙하지 않을 독자들을 위해 설명을 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홍등가는 비유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붉은 빛의 등이 걸려 있는 거리다. 투다리에 걸려 있는 그 조명들이 탄광촌 동네의 좁은 언덕길을 따라 배치된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굉장히 많은 수의 한국 여성들이 셀카봉을 들고 이리저리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대단히 많은 노력을 들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사람들 중에 자기 발 밑으로 지나다니는 바퀴벌레들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진이 잘 나올 것 같다고 어떻게 앉아서 사진을 찍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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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을 때는 어쩔지 몰라도 사람이 별로 없을 때는 구석구석 돌아다닐 만한 규모다. 좁은 골목의 정취가 묻어나오는 시장도 좋지만 시장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해안선이 보이는 한적한 동네가 나온다. 꼭 대천이나 가면 있을 법한 해안가의 작은 마을인데 집집마다 하얀 등을 켜놓아 그 광경이 사뭇 신비롭고 황홀하다. 밤의 지우펀에서 꼭 봐야 할 것이 있다면 다른 야시장에 비해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는 시장보다는 역시 이 해안가 마을의 풍경이다. 캐주얼한 여행객으로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만큼 지우펀 동네의 다른 명소들(지도 같은 것을 보면 이리저리 가볼 만한 곳이 많아보이기는 했다.)을 가보지 못했지만 지우펀에서 눈으로 본 것 중에는 가장 기억에 남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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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치고 지우펀에 간다면 꼭 한 번 먹어봐야 할 것이 있다. 버스 정류장으로부터 시장을 관통하는 길을 걷다 보면 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다른 가게에 비해 제법 규모가 있으며 테라스 같은 공간이 있고 한켠에 동전 망원경이 있는 음식점이 있다. 지우펀을 가서 둘러봤는데도 이와 비슷한 음식점이 없다면 아마도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시점에 그 음식점은 다른 공간으로 변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여하튼 누가 봐도 방금의 묘사와 비슷한 이 음식점에서 생강이 들어간 맑은 조갯국을 꼭 먹어보라.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해산물이 유독 싱싱한 느낌이 있는데 여기서 먹은 조개와 그 국물은 내가 살면서 먹어본 그 어떤 조개와 국물 조합보다 맛이 있었다. 해산물에는 특히나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P 역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대단했다. 솔직히 타이페이 여행기를 통틀어 가장 맛있는 음식을 두 개 꼽으라고 하면 이 조갯국과 이 다음 날에 먹게 될 새우튀김이고 굳이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망설임 끝에 이 조갯국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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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이 찢어질 것 같이 큰 소리를 내는 노란색 쓰레기차가 종종 그 좁은 골목을 지나다니는데 본인들은 어떻게 느낄지 몰라도 서울에서 온 두 명의 관광객에게는 엄청난 난폭운전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모르니 그들을 조심하자. 꼭 그 색깔과 파괴력이 바이오쇼크에 나오는 빅 대디를 연상하게 한다.
열심히 사진도 찍고 군것질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다가 상점들이 점점 문을 닫는 것을 보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9시가 다 되었던 것 같은데도 원래의 버스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P가 어느 블로그에서 봤다며 언덕길을 향해 조금 더 올라가다가 갈래길에서 좌측으로 가면 하나 이전의 버스정류장이 있다고 했다. 거의 버스 두 대는 그냥 보내야 할 것 같은 인파였기에 깜깜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플랜 비를 따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버스 정류장까지 나온 시점에서 두 번째 오는 버스를 탔던 것은 다름이 없었지만 정말 사람이 거의 없는 버스에서 편한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지우펀 버스 정류장은 종점까지 두 정거장밖에 안 걸리는 곳이므로 그냥 종점 방향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다시 새 버스를 타고 나오든지, 아니면 나처럼 이전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든지 하면 조금 더 돌아오는 길이 쾌적할 것이다.
워낙 시골 동네라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엔 딱히 야경이랄 만한 것이 없어 편하게 왔다. 원래 입석이 허용되지 않는 버스로 알고 있었으나 마음씨 좋은 버스 기사는 사람들을 조금씩 더 태웠다. 먼 거리를 가는데 좌석이 없어 바닥에 앉은 손님에게 뭐라도 깔고 앉으라며 판대기를 내어주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타이페이 시내로 접어드는 길은 지우펀으로 향하던 것과는 달리 정체가 없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송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허겁지겁 버스를 내렸다. 그렇게 어영부영 타이페이에서의 두 번째 밤이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