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여행기 0 : 프롤로그


오랜 고등학교 동기 Y가 뉴욕에서 생활을 시작한 지가 꽤 되었으나 실제로 그 친구를 보러 뉴욕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9월의 어느 한적한 평일 오후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중, 그 친구가 갑자기 뉴욕이나 놀러오라는 이야기를 던졌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이 친구를 보러 뉴욕에 가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음을 깨달으면서 비행기 표 가격이나 한 번 보겠다고 대답하고는, 결국 JFK 직항 왕복 표삯이 11월만 되어도 100만원 초반대라는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항공권 결제와 휴가 결재를 마치고 달력에 선을 주윽 그어 “휴가”라는 꼬리표를 달아두었다.

한국 시간으로 11월 12일 정오 전에 출발해 11월 20일 오후 6시 무렵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숙박은 관대한 친구 Y의 도움에 힘입어 따로 숙박 업소를 예약하지 않고 뉴욕에서 머무는 7박 내내 Y의 집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뉴욕의 무시무시한 숙박료와 다른 여러 가지 불편함을 고려할 때 어마어마한 조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계획은 거의 아무런 것도 짜가지 않았다. 어렴풋이 가볼까 했던 UFC 205는 뉴욕에서 열리는 첫 대회인 만큼 주최측에서 무척이나 거대한 대진 카드를 들고 나와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가장 조악한 뷰를 자랑하는 자리에 앉더라도 최소 $750 이상을 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마음을 접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적당히 시간이 되면 뉴욕 자이언츠의 경기나, 뉴욕 닉스의 경기 정도를 관람하고, 또 시간이 되면 콘서트나 한 번 가보자, 그리고 아직 어딘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미술관들을 좀 돌아보고 하자, 정도가 뉴욕으로 떠나는 아시아나 A380에 몸을 실었을 때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의 전부였다.

출발 전날이었던 금요일에는 오후 반차를 쓰고 사당 자취방에서 짐을 싼 뒤 저녁에 연희동으로 갔다. 집에서 남은 짐을 더 챙기고 글렌리벳 15년산을 홀짝홀짝 먹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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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캬비크로 가기 전에 짐을 조금 덜기 위해 출국(?) 전날 일요일 K의 거처로 향하던 버스 안이었다. 버스가 탑승객이 없는 정류장에 멈췄다가 출발하는가 싶었는데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버스를 쫓아 손을 흔들며 차를 세웠다. 뒤이어 안내견을 동반한 시각장애인이 버스에 올라탔고 비교적 한산했던 버스의 빈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몇 정거장이 지나 버스가 어떤 정류장에 멈췄고 시각장애인은 안내견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말 그대로 심리스한 광경이었다. 시각장애인이 버스를 기다리고 탑승하여 원하던 정류장에 내리는 일련의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역할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