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페이 여행기 16 : 에필로그


새벽 4시쯤 일어나니 잠을 잘 자기는 개뿔 눈이 막 피곤해서 혼이 났지만 버스를 놓칠 수는 없었기에 좀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P를 잘 달래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나왔다. 리젠트 타이페이의 직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다만 콜택시 예약 취소를 할 때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당직 직원이 택시가 준비되었다고 알려주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아까 저녁에 취소했다는 말을 건네자 그냥 택시를 보내버렸다. 나의 잘못이라고까지 하긴 힘들지만 그 새벽에 일부러 시간 맞춰 호텔로 와준 기사에게는 미안할 따름이었다.

적당히 싸늘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버스를 기다렸다. 덜컹이는 공항 버스(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리무진 버스 수준은 아니고 그냥 일반 시내버스 수준이었다.)에 서 눈을 붙이기란 아무래도 힘든 일이라 거의 뜬눈으로 타이페이의 새벽 풍경을 눈에 담았다. 예상한 대로 여유로운 시각에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했고 정상적으로 수속을 마친 뒤 피로가 만연한 몸을 끌고 탑승 게이트에 도착했다. 대만이 자랑하는 전자 산업을 대변하듯 전자 회로가 배경으로 박힌 “MADE IN TAIWAN” 문구 아래서 여행을 회고하기는 커녕 졸려서 거의 아무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비행기에 올랐다. 그 동안 수천 수만 번은 반복했을 절차들을 거쳐 비행기가 안전하게 이륙했고 중화항공 비행기의 뒷바퀴가 활주로 위로 뜨는 순간 P와 함께 했던 3박 4일 동안의 대만 여행이 끝이 났다.

뒷부분의 이야기가 실제 여행 날짜로부터 거의 반 년이나 지나 작성된 탓에 디테일한 부분에서 기억이 미화되었음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대만 여행은 이 여행기에서 쓰여진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이국적이지도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시점에 와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돌이켜봤을 때 이렇게 좋은 기억만 많이 남는 여행은 그렇게 흔치 않다는 것이다. 3박 4일 내내 날씨가 좋았던 덕도 봤고 숙소가 매우 쾌적한 덕도 봤고 불미스러운 일도 전혀 일어나지 않은 덕도 봤겠지만 무엇보다 동행 P의 존재가 컸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무엇이냐. 당신이 어디를 언제 여행하든 간에 당신이 전적으로 믿고 동의할 수 있는 사람과 가라는 것이다. 그 조건만 만족이 된다면 누군가에겐 평범했을 수도 있는 지우펀의 조갯국이나 단수이의 노을이 커다란 기쁨과 감동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고유한 경험이 당신의 여행을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여행의 기억이 동행과의 관계를 더욱 더 끈끈한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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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캬비크로 가기 전에 짐을 조금 덜기 위해 출국(?) 전날 일요일 K의 거처로 향하던 버스 안이었다. 버스가 탑승객이 없는 정류장에 멈췄다가 출발하는가 싶었는데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버스를 쫓아 손을 흔들며 차를 세웠다. 뒤이어 안내견을 동반한 시각장애인이 버스에 올라탔고 비교적 한산했던 버스의 빈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몇 정거장이 지나 버스가 어떤 정류장에 멈췄고 시각장애인은 안내견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말 그대로 심리스한 광경이었다. 시각장애인이 버스를 기다리고 탑승하여 원하던 정류장에 내리는 일련의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역할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