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페이 여행기 13 : 단수이의 뒷골목


호텔을 나서기 전에 다음 날 새벽에 어떻게 공항까지 갈지 프론트 직원에게 물었다.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는 직원의 말에 서울이라고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옆에 있던 분께서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안내를 시작했다. 한국분이었다. 콜택시를 불러서 가는 법과 공항 버스를 이용하는 법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다소 비싼 감이 있었지만 남은 돈이나 쓰고 오자는 생각으로 택시 편을 선택했다. 한국인 직원은 택시 예약을 마쳤고 우리는 다시 “인간 자동문”을 뚫고 거리로 나섰다.

해가 질 무렵의 풍광이 그렇게 좋다고 하여 그 시간쯤 바닷가에 가 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타이페이의 2호선인 담수신의선의 종점인 담수(단수이)역에 석양이 오기 전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해안가로 이동,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를 조금 둘러보고 바닷가를 거닐다 해가 지면 단수이의 옛 거리에 있다는 야시장 골목을 걸어 내려와 다시 단수이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리젠트 타이페이로 이동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조금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거의 완벽했던 계획이었다.

단수이역역이 종점인 만큼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으나 대부분의 이동 구간이 지상으로 나와 있고 시내를 빠져나오자마자 펼쳐지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자연 풍경을 보며 갈 수 있어 크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전철이 단수이역에 가까워짐에 따라 승객들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것이 딱 봐도 남은 사람들은 단수이로 가는 느낌이 들었는데 평일 오후라 그런지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단수이역에 내렸을 때는 하늘의 1할 정도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어디서 봤던 가이드를 따라 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좁게 난 도로를 지나 «말할 수 없는 비밀» 촬영지로 유명한 담강중학교 근처에서 내렸다. 사족이지만 나는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막 화제가 되었을 당시에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봤는데 그렇게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는 기억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의 아름다운 기억에 매료되어 찾아간 곳이라기보다는 그냥 좋다고들 하니까 가기로 결정한 곳이었다 정도.

아니나다를까 나와 동행 P의 관심은 단수이의 특정한 몇몇 관광지라기보다는 그저 그 동네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한적함, 여유로움, 이국적임, 그리고 이번 대만 여행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던 그 풍경으로 쏠렸다. 우리는 이내 계획을 바꿔 단수이의 뒷골목을 노니며 사진을 찍고 시간을 보냈다. 하늘의 색을 보니 천천히 돌아다녀도 시간에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푸르게 자라난 수풀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주는 공감각적 쾌감이 이루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아무도 걷지 않는 담강중학교 근처의 뒷골목엔 정말 멋진 장소들이 많았다. 여행의 큰 기쁨 중 하나는 이렇게 기대하지 못한 뜻밖의 발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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