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자고로 숫자라는 것은 범우주적으로 보편타당하고 덧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이 갖는 의미란 지구라는 일개 행성에 잠시 나타났다가 스러져가는 인간 종족의 한낱 말장난질에 불과할 뿐이기 마련이지만, 인간이란 자고로 한심하고 끝없는 실수를 반복하는 특성을 가지기에 굳이 옛날 이야기를 하나 꺼내오자면, 내가 나고 자란 뒤 숫자로 평가 받던 시절인 고등학교 3 학년 당시 모의고사로 가장 높은 성적을 받았을 때의 전국 단위 백분율이 0.1% 근처였더랬다. 그 성적표를 받아든 나는 이제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더 이룰 것은 없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하산의 의미로 더 이상 머리에 새로운 지식을 쌓지 않았다. 더 준비를 해서 집에서 가까운 연세대 의대를 가라던 담임의 이야기를 무시, 기왕 공대를 갈 거라면 서울대를 가라던 담임의 2 차 이야기도 무시한 나는 집을 떠나기 위한 일념 하나로 대전으로 떠났고 그렇게 나의 무시무시함은 내 삶에 큰 복수를 하게 되는데…

뒷이야기는 각설하고, 생각보다 대학교(또는 기술원) 이후의 삶에서 나를 그렇게 엄격하게 숫자로 재단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학부 과정 동안 GPA 니 하는 것이 있었고 각종 고시나 또 다른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에겐 어떤 시험의 점수니 등수니 하는 것이 왕왕 화제에 오르긴 했지만 적당히 놀면서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군대 다녀와서 적당히 취업한 삶에 그렇게 노골적으로 숫자가 끼어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취업한 이후의 삶에서야 연봉이니 재산이니 수익률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가끔 나오기는 하지만 이젠 그런 것에 잘 연연하지 않게 되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것들이 삶에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는 것인지 별 감흥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없었다. 바로 이 미친 선물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주변에 정신이 이세계(異世界)에 가 있기로는 손에 꼽을 수 있는 이상한 친구 K 와 P 가 합심하여 사준 나의 집들이 선물은 무려 나의 그림이다. 나를 지나치게 호리호리하게 묘사해서 이게 캐리커처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의 이 묘한 그림은 보면 볼수록 관객으로 하여금 불쾌한 감상에 젖게 하는데, 그 느낌이야말로 이 그림의 백미라고 생각한 나는 거실에서 눈에 제일 잘 띄는 자리에 그림을 놓았다. 그냥 덩그러니 있으면 너무 애니메이션 <코코>에 등장하는 제단을 연상시켜 앞과 옆에 뭐라도 좀 놓았다. 그러니까 그나마 좀 낫다.

서두에 재미없는 숫자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이 그림 때문이다. 분리형 원룸 거실에 이렇게 묘한 바이브를 주는, 본인을 그린 그림을 놓고 사는 사람은 전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단언컨대 0.1% 안짝이라고 생각한다. 도무지 제대로 된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는 K 와 P 덕에 나는 이렇게 또 한 번 19 살의 나를 뛰어넘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지만 또 받고 나면 괜히 버리기는 찝찝한 선물을 궁리하고 계신 여러분들께 강력하게 초상화 선물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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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초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론, 나는 웬만해서는 TV 가 보이는 자리를 서로 피하려고 하고, 정 피할 수 없을 때는 내가 TV 를 등지는 자리를 선호한다. TV 를 생활 공간, 업무 공간에 두고 있지 않은 나는 아무래도 TV 가 보이면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인데, 그것을 맘에 들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기 때문이다.

등산

일요일에는 관악산을 다녀왔다. 2016 년, 다니던 회사의 또래 친구들과 다녀온 뒤 처음으로 가는 관악산행이었다. 날씨가 정말 더웠고 사당역에서 올라가는 길이 생각보다 험했음에도 별탈 없이 무사 귀환했다. 약 5 시간 정도 이어진 등산 및 하산 중 느꼈던 것들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향초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향이 없는 사람으로 곧잘 인식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자연스러운 체취든, 별도로 얹은 향이든 내 몸에는 냄새라는 것이 잘 붙어있질 않는다. 향수를 뿌리고 바로 외출해서 만난 사람이 향수를 전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사람들의 후각을 탓했지만 비슷한 일화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향수를 너무 진하게 뿌린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종종 있긴 했다. 나는 그 사람들의 후각도 의심하고 있다.)

Le Creuset skillet

그간 사용하던 테팔 팬이 있었다. 이제는 다소 낡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사온 집의 하이라이트(나는 여태까지 이걸 인덕션이라고 불러왔는데 얼마 전에 하이라이트라고 부르는 게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와는 사이즈가 잘 맞질 않았다. 2 구 하이라이트의 더 큰 구가 너무 벽에 붙어 있어서 기존의 팬을 사용하면 온도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그냥 하나 샀다. 요새 보니까 어딘가에서 엄청난 물량이 병행수입을 하는지 이곳저곳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 있는 르쿠르제의 23cm 스킬렛이다. 아직 사용해보진 않았지만 물건을 딱 봤을 때의 소감은 1. 진짜 무겁다. 이걸 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관절 관리를 열심히 하지 않을 경우 곧 손목이 고장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2. 진짜 무거우니까 웬만하면 작은 사이즈를 살 것. 3.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무겁다.

PC함

PC는 기본적으로 불편한 개념이라고 본다. 하지만 PC를 지킬 때 당사자가 느끼는 불편함은 PC를 지키지 않을 때 대상자가 받는 불편함에 비해선 미미할 것이다. 업계 사람들이 그렇게 물고 빠는 피터 티엘이 이야기한 것처럼 PC는 다양한 논의가 오가는 것을 저해하는 "가장 거대한 정치적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다양한 논의를 공정하고 균형감 있게 진행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고 생각한다.

소주잔

무슨 쓸데없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놨냐면 지난 주에 자정이 지난 1시 반쯤 퇴근한 적이 있는데 그 전에 집에 놀러왔던 인턴 한 분이 그 심야의 엘리베이터에서 선물이라며 소주잔 세트를 꺼냈고 지난 일요일 혼자서 삼겹살을 사다가 구워 먹으며 그 소주잔에 혼자 소주를 따라먹으니 이렇게나 좋을 수가 없다는 느낌과 함께 아마 지금 사당역 인근에서 내 기준에 제일 좋은 술집은 내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갈한 낡음은 없지만 화장실이 청결하고 적당히 어둡게 조명을 켤 수 있으며 음악은 최고이고(물론 내가 선곡을 할 때의 이야기다.) 향초도 있고 술은 여러분이 맛있는 거 가져오면 되고 안주는 물만 있어도 되며 나는 훌륭한 사람이고 여러분도 훌륭한 사람이니까 이보다 더 환상적인 조합이 어디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