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초


술 먹으러 나가기 전에 쓰는 짧은 술자리 이야기.

대한민국에서 술을 먹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이른바 “한국식” 술자리 매너라는 키워드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잔을 돌리는 순서, 병을 잡는 방법, 고개를 돌리는 방향 등 딱 봐도 헛소리인 것을 제외하고, 비단 술자리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도 지켜야 할 기본적인 매너를 제외하고, 나름 눈에 많이 띄지 않으면서 기억하고 있으면 좋을 만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 이야기도 어느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1. 술자리 일행이 나를 제외하고 1 명만 있는 상황, 2. 적당히 한 번쯤은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전화기를 보는 타이밍이 올 정도의 시간을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는(그러니까 아주 빠르게 한 잔 들이키고 갈 거라면 별로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다.) 전제라면 좀 더 그럴싸하다.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나와 상대방의 자리 배치에 관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동선에 자꾸 걸리는 자리에 앉히지 말라, 더 편한 의자에 앉혀라, 화장실에 아주 붙어 있는 자리는 피해라 같은, 위에서 언급한 “기본 매너”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내가 소중한 상대와 술을 먹을 때 본능적으로 고려하게 되는 것은, 상대방이 자리에 앉았을 때 보이는 광경이 단조롭진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벽을 보는 것보다는 더 넓은 시야를 내어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고(이는 많은 상점 공간에서 벽쪽의 편한 자리를 양보하는 것과 같은 결론이지만 어쨌든 다른 마음가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테판야키 전문점처럼 주방이 오픈되어 있는 곳이라면 철판을 바라보는 자리를 내어준다거나(물론 같이 볼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좁은 공간에서라면 문 방향, 또는 바깥 방향을 내어주는 것이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이야기기 때문에 이유 같은 구차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론, 나는 웬만해서는 TV 가 보이는 자리를 서로 피하려고 하고, 정 피할 수 없을 때는 내가 TV 를 등지는 자리를 선호한다. TV 를 생활 공간, 업무 공간에 두고 있지 않은 나는 아무래도 TV 가 보이면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인데, 그것을 맘에 들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기 때문이다.

오늘은 대림에 가서 훠궈를 먹을 것이다. 마침 시간도 인간이 가장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는 저녁 9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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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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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일요일에는 관악산을 다녀왔다. 2016 년, 다니던 회사의 또래 친구들과 다녀온 뒤 처음으로 가는 관악산행이었다. 날씨가 정말 더웠고 사당역에서 올라가는 길이 생각보다 험했음에도 별탈 없이 무사 귀환했다. 약 5 시간 정도 이어진 등산 및 하산 중 느꼈던 것들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향초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향이 없는 사람으로 곧잘 인식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자연스러운 체취든, 별도로 얹은 향이든 내 몸에는 냄새라는 것이 잘 붙어있질 않는다. 향수를 뿌리고 바로 외출해서 만난 사람이 향수를 전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사람들의 후각을 탓했지만 비슷한 일화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향수를 너무 진하게 뿌린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종종 있긴 했다. 나는 그 사람들의 후각도 의심하고 있다.)

Le Creuset skillet

그간 사용하던 테팔 팬이 있었다. 이제는 다소 낡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사온 집의 하이라이트(나는 여태까지 이걸 인덕션이라고 불러왔는데 얼마 전에 하이라이트라고 부르는 게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와는 사이즈가 잘 맞질 않았다. 2 구 하이라이트의 더 큰 구가 너무 벽에 붙어 있어서 기존의 팬을 사용하면 온도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그냥 하나 샀다. 요새 보니까 어딘가에서 엄청난 물량이 병행수입을 하는지 이곳저곳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 있는 르쿠르제의 23cm 스킬렛이다. 아직 사용해보진 않았지만 물건을 딱 봤을 때의 소감은 1. 진짜 무겁다. 이걸 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관절 관리를 열심히 하지 않을 경우 곧 손목이 고장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2. 진짜 무거우니까 웬만하면 작은 사이즈를 살 것. 3.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무겁다.

PC함

PC는 기본적으로 불편한 개념이라고 본다. 하지만 PC를 지킬 때 당사자가 느끼는 불편함은 PC를 지키지 않을 때 대상자가 받는 불편함에 비해선 미미할 것이다. 업계 사람들이 그렇게 물고 빠는 피터 티엘이 이야기한 것처럼 PC는 다양한 논의가 오가는 것을 저해하는 "가장 거대한 정치적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다양한 논의를 공정하고 균형감 있게 진행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고 생각한다.

소주잔

무슨 쓸데없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놨냐면 지난 주에 자정이 지난 1시 반쯤 퇴근한 적이 있는데 그 전에 집에 놀러왔던 인턴 한 분이 그 심야의 엘리베이터에서 선물이라며 소주잔 세트를 꺼냈고 지난 일요일 혼자서 삼겹살을 사다가 구워 먹으며 그 소주잔에 혼자 소주를 따라먹으니 이렇게나 좋을 수가 없다는 느낌과 함께 아마 지금 사당역 인근에서 내 기준에 제일 좋은 술집은 내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갈한 낡음은 없지만 화장실이 청결하고 적당히 어둡게 조명을 켤 수 있으며 음악은 최고이고(물론 내가 선곡을 할 때의 이야기다.) 향초도 있고 술은 여러분이 맛있는 거 가져오면 되고 안주는 물만 있어도 되며 나는 훌륭한 사람이고 여러분도 훌륭한 사람이니까 이보다 더 환상적인 조합이 어디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