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잔


술 먹는 곳을 추천해달라는 이야기를 꽤나 자주 듣는 편이다. 살아온 길을 돌아봤을 때 당연한 일인데,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주 길게 있을 것 같지만(사실 제대로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한 번 짧게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우선 물리적 공간 자체에 대해서다. 나는 밝은 술집을 싫어한다. 아마 많은 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술집 중엔 휘황찬란한 백색 형광등 빛을 자랑하는 곳들도 있다. 그런 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부제가 달리는 곳이다. 술집은 자고로 어두워야 한다. 인테리어 컨셉에 대한 호불호는 딱히 없는데 굳이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정갈한 낡음을 선호한다. 다만 화장실만큼은 청결해야 한다. 음악은 내 취향에 맞거나 공간의 전체적인 흐름에 일맥상통해야 제맛이다. 그렇지 않을 거면 차라리 음악이 없는 편이 낫다. 향초 향을 좋아한다. 나그참파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다음은 공간의 주요 컨텐츠인 먹고 마실 거리에 대해서다. 주종은 (당연하게도) 딱히 가리는 것이 없다. 다만 알콜 도수에 따라 두루 선호를 맞출 수 있게 술이 구비되어 있으면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가기 좋겠다. 안주 역시 딱히 가리는 것이 없다. 이는 내가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맛있음”에 크게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방증이며 먹을 것 전반에 있어 “맛있음”에의 무감각함과 술만 있으면 절반은 된다는 술 지상주의적 인식의 발현이다.

마지막으로는 그 공간을 가꾸고 향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다.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스타일은 크게 관심이 없다. 말을 좀 거는 타입이어도 좋고 혼자 왔든 우울해보이든 어떻든 개의치 않는 타입도 좋고 단골이라고 챙겨줘도 좋고 그런 건 얄짤이 없어도 좋다.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편안함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해주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영역인데, 그러니까 내가 술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어디에 앉는지, 어떤 술과 안주를 시키는지, 추가로 어떤 주문을 넣는지 등 그 안에서 벌어지는 나의 행동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대부분의 점잔 빼는 곳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 편안함을 좌지우지하는 또 하나의 큰 요소가 나와 내 일행 외의 다른 손님들이다. 이에 대해선 할 말이 많으나 하지 않겠다. 대부분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무슨 쓸데없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놨냐면 지난 주에 자정이 지난 1시 반쯤 퇴근한 적이 있는데 그 전에 집에 놀러왔던 인턴 한 분이 그 심야의 엘리베이터에서 선물이라며 소주잔 세트를 꺼냈고 지난 일요일 혼자서 삼겹살을 사다가 구워 먹으며 그 소주잔에 혼자 소주를 따라먹으니 이렇게나 좋을 수가 없다는 느낌과 함께 아마 지금 사당역 인근에서 내 기준에 제일 좋은 술집은 내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갈한 낡음은 없지만 화장실이 청결하고 적당히 어둡게 조명을 켤 수 있으며 음악은 최고이고(물론 내가 선곡을 할 때의 이야기다.) 향초도 있고 술은 여러분이 맛있는 거 가져오면 되고 안주는 물만 있어도 되며 나는 훌륭한 사람이고 여러분도 훌륭한 사람이니까 이보다 더 환상적인 조합이 어디있겠는가?

맛있는 술 들고 놀러오세요. 선물도 잊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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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초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론, 나는 웬만해서는 TV 가 보이는 자리를 서로 피하려고 하고, 정 피할 수 없을 때는 내가 TV 를 등지는 자리를 선호한다. TV 를 생활 공간, 업무 공간에 두고 있지 않은 나는 아무래도 TV 가 보이면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인데, 그것을 맘에 들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기 때문이다.

등산

일요일에는 관악산을 다녀왔다. 2016 년, 다니던 회사의 또래 친구들과 다녀온 뒤 처음으로 가는 관악산행이었다. 날씨가 정말 더웠고 사당역에서 올라가는 길이 생각보다 험했음에도 별탈 없이 무사 귀환했다. 약 5 시간 정도 이어진 등산 및 하산 중 느꼈던 것들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향초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향이 없는 사람으로 곧잘 인식된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자연스러운 체취든, 별도로 얹은 향이든 내 몸에는 냄새라는 것이 잘 붙어있질 않는다. 향수를 뿌리고 바로 외출해서 만난 사람이 향수를 전혀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사람들의 후각을 탓했지만 비슷한 일화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향수를 너무 진하게 뿌린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종종 있긴 했다. 나는 그 사람들의 후각도 의심하고 있다.)

Le Creuset skillet

그간 사용하던 테팔 팬이 있었다. 이제는 다소 낡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사온 집의 하이라이트(나는 여태까지 이걸 인덕션이라고 불러왔는데 얼마 전에 하이라이트라고 부르는 게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와는 사이즈가 잘 맞질 않았다. 2 구 하이라이트의 더 큰 구가 너무 벽에 붙어 있어서 기존의 팬을 사용하면 온도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그냥 하나 샀다. 요새 보니까 어딘가에서 엄청난 물량이 병행수입을 하는지 이곳저곳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 있는 르쿠르제의 23cm 스킬렛이다. 아직 사용해보진 않았지만 물건을 딱 봤을 때의 소감은 1. 진짜 무겁다. 이걸 주로 사용하는 사람은 관절 관리를 열심히 하지 않을 경우 곧 손목이 고장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2. 진짜 무거우니까 웬만하면 작은 사이즈를 살 것. 3.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무겁다.

PC함

PC는 기본적으로 불편한 개념이라고 본다. 하지만 PC를 지킬 때 당사자가 느끼는 불편함은 PC를 지키지 않을 때 대상자가 받는 불편함에 비해선 미미할 것이다. 업계 사람들이 그렇게 물고 빠는 피터 티엘이 이야기한 것처럼 PC는 다양한 논의가 오가는 것을 저해하는 "가장 거대한 정치적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다양한 논의를 공정하고 균형감 있게 진행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