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소비: 브레이킹 배드 시즌1


이직 후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시간을 채울 일이 필요했다. 지하철이 유일한 교통수단이라고 알던 시절에는 사당에서 선릉으로 이어지는 지옥의 2호선 구간 탓에 뭘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1500-2번 버스가 지하철보다 더 빠르고 쾌적하다는 것을 알고난 뒤 그 시간에 넷플릭스를 보기로 했다. 드라마라고는 거의 보지 않던 내가 지독히도 좋아하는 데이빗 핀처의 마인드헌터를 볼까 하다가, 별 이유없이, 불후의 명작이라 칭송 받는 브레이킹 배드를 나의 첫 넷플릭스 소비작으로 정했다. 지난 1주일 동안 출퇴근 시간, 회사에서 아침 먹는 시간, 점심을 먹지 않을 때 남는 시간 등을 알차게 활용하여 시즌1을 정주행했다. 역시는 역시 역시인 법인지라 굳이 나의 조악한 언어로 작품의 훌륭함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몰입해서 감상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작품에는 화학 이야기가 꾸준히 나온다. 화학… 화학…에 대해 생각을 하다보니 10년이 조금 넘은 과거의 언젠가가 떠올랐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외국어 고등학교라 학교에서 이과 입시를 준비하는 것에 여러 제약이 있었다. 그 제약 중 가장 크게 다가왔던 것이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과학탐구 과목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인데 본인이 따로 사교육으로 해결을 할 것이 아니라면 화학1, 물리1, 생물1, 그리고 화학2를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학교측에서는 전략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이었다. 비교적 난이도가 있는 2과목을 하나로 줄이고 그 하나의 과목으로 수험자가 제일 많은 화학2를 고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다른 선택지가 딱히 없는 상황에 떠밀려 화학2를 공부하게 되었다. 나름 재미도 붙였으며 당연히 성적도 좋았다. 카이스트에 합격한 나는 자연대보다는 공대 계열의 전공이 끌렸고 과탐 2과목으로 화학2를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생각없이 화학공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카이스트의 모든 신입생은 무학과로 입학을 하며 2학년부터 자유롭게 예비 전공 과정을 선택한다. 따라서 1학년 때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통으로 기초 강의를 수강한다. 나는 1학기 때 그 기초 강의 중 하나인 일반화학1을 들었다. 당연히 화공을 전공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게 일반화학1의 세계는 블랙 바디처럼 어렵고 어두컴컴했다. (변명을 하나 덧붙이면 이 때는 정말 공부를 안 했다. 당시 듣던 과목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안 했다고 본다.) 중간고사 이후 어느 때부터 아예 수업을 안 들어버리게 된 일반화학1 성적은 C0였다. 학기가 끝난 뒤엔 이미 화학 관련된 전공을 하겠다는 생각도 버린 상태였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1학년 2학기 생활로 접어든 내가 그 다음 예비 전공 후보로 꼽은 것은 수학이었다. 1학기 때 들은 고급 미적분학1에서 B+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1학년 2학기엔 기본 강의로 미적분학2가 있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수2 과정을 정상적으로 마쳤다면 비교적 익숙한 내용들이 나오는 미적분학1과는 달리(물론 나는 입실론 델타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미적분학2에서는 벡터 미적이 등장하면서 3차원의 세계에서 도식적인 성립이 불가능한 여러 차원과 다른 좌표계의 미적분, 거기에 역삼각형, 도트 등의 해괴한 기호가 난무하는 여러 정리가 더해지는 세계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블랙 바디에 빠져드는 기분을 느꼈다. 일반화학1과 마찬가지로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냥 정신을 놓았으며 이듬해 연초인가에 도착한 1학년 2학기 성적표에 미적분학2의 옆에는 D+라는 경이로운 성적이 적혀 있었다. 나는 또 다시 전공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대학교 때까지 기타를 꽤 열심히 치고 있었던 나는 앰프나 이펙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정말이지 막연한 생각 하나로 전자과를 가기로 결심한다.

2학년부터 시작한 전자과 생활은 모든 면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회로는 옴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다이오드가 나오면서 지식 생산을 멈췄으며 벡터 미적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자기학 역시 꽝, 선형대수학개론이나 응용미분방정식과 같은 관련된 수학 공부도 영 실적이 없었고 실험메이트들에게 음료수를 갖다 바치고 옆에서 가만히 앉아서 빵판맨 같은 거나 만들었다. 결국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는 휴학을 했고 그 사이에 카투사 발표가 나며 1년 휴학에 군 휴학 2년을 얹어 3년 동안 대전을 떠나게 된다. 복학이 다가오면서 전공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석사 과정에 들어간 동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여러 의견을 모은 결과 복학 전에 코딩 공부를 좀 하고 전공 학점 쿼터를 전자과에 있는 모든 코딩 수업으로 채우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선택이 재밌는 건 1학년 1학기에 CS101 수업으로 자바를 배웠는데, 그 당시의 이한결은 ‘앞으로 다시는 코딩을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며 전혀 수업을 듣지 않았고 C-의 성적을 받았다는 것이다. 트리비아를 하나 덧붙이면, 이 CS101의 C-는 내가 카이스트에서 받은 학점 중 제일 낮은 학점이다.

그렇게 병장 말년 생활부터 짬짬이 자료구조와 C 공부를 한 나는 복학 후 전자과에서 코딩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수업들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갔다. 당시의 적당한 학점 인플레 현상에 힘입어 졸업장에 우등졸업장을 더 받기도 했다. 2013년 가을부터 2014년 여름까지 이어진 짧은 스타트업 생활에서 웹 개발에 입문했고 그 경험과 인맥을 통해 졸업 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SK 플래닛에 입사했다. 여러 회사를 옮겨다니다가 지금은 라인에서 백엔드 개발을 맡았다. 반복적으로 좌절된 시도를 통해 여러 선택지를 지워내고 유일하게 남은 길로 나아간 케이스라는 것을 고려하면 무척 성공적인 결과라고 본다. 돌이켜보면 과거에도 그런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기말고사쯤 어머니는 처음으로 나를 보습학원에 보냈는데 그 다음 배치고사 지망에 그냥 쉬엄쉬엄 내신 준비만 하는 이름만 “특반”인 반을 1지망에, 그나마 수학 과학이 재밌으니까 과고반을 2지망에, 그리고 3지망에 외고반을 썼는데 배치고사 뒤에 내가 들어간 반은 외고반의 꼴찌(?)반이었다. 그 뒤 어떻게 어영부영 외고 B반까지 올라갔고 외고별 반으로 나뉠 때 당시에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는 대원반에 지원을 해서 공부를 하다가 어찌저찌하다 덜컥 합격을 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땐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약을 만들어서 지구를 정복하고 우주 공간에서 살겠다는 헛소리를 친구들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지금 내게 월터 화이트의 화학 지식과 크리스탈을 만들 장치가 구비된 밴이 생긴다면, 그리고 월터 화이트와 같이 “브레이크 배드”를 할 만한 충분한 상황에 몰린다면,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올바른” 시도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면, 남은 몇 안 되는 선택지를 쥐고 차선책을, 차선의 차선책을 찾아나갈 수 있을까. 궁지에 몰린 빡빡이 크리스탈 장인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떠올린 아무런 맥락도 결론도 없는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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