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소비: 유니클로 벨트


아메리칸 어패럴이 힙한 브랜드의 절정을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명동 한복판에서 약간 골목길로 들어가는 곳에 2층짜리 매장을 두고 티셔츠를 색상별로 전부 다 사버리고 싶게 하는 그런 마약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던 때였다. 아메리칸 어패럴의 가방과 티셔츠, 지퍼가 달린 후디와 지퍼가 달리지 않은 후디, 데님 셔츠까지 내가 소화할 만한 정도의 아이템은 이것저것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AA의 호시절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미국 서부 스타일 힙함을 대변하는 명동 AA 매장 건너편에는 에이랜드라는 편집샵 매장이 있었다. 지금이야 정체성이 없는 것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두는 곳이 되어버렸지만 예전에는 꽤 괜찮아보이는 것들이 많은, 명동에서 할 일이 없으면 한 번 들어가서 슬렁슬렁 구경할 만한 곳이었다. 특유의 중독성 있는 매장 인사법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안녕하세요 에이랜드입니다”의 “다”를 묘하게 끌면서 살짝 끝을 올리는 그 인사법.

용산에서 군 생활을 하던 시절 어느 날 에이랜드에서 허리띠를 샀다. 노란색과 청색 계열의 신축성 있는 패브릭이 X모양으로 교차를 해서 버클을 대충 어디에나 끼울 수 있는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면서 여러분이 바로 상상할 수 있는 바로 그런 벨트였다. 기억에 따르면 절기상 아무래도 2011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6년 정도를 아주 열심히도 차고 다녔다. 녀석의 상태가 안 좋다고 느낀 것도 사실 2년은 족히 된 것 같다. 뭔가 내 허리에 최적화된 착용감을 주는 느낌이라 녀석을 쉽게 다른 놈으로 대체하는 것을 미뤄왔다.

지난 토요일 외출을 준비하며 장을 열었다가 녀석의 처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소곳하게 말려 있었지만 옆구리도 군데군데 터졌고 벨트 팁의 양 끝의 인조 가죽은 절반쯤 떨어져 나갔으며 버클의 금속은 제조연도 1950년이 적혀 있는 군대 수통을 보는 듯했다. 마침 코엑스를 가는 길이기도 해서 에이랜드를 들러 이 벨트의 환생 후계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2011년 명동 에이랜드의 벨트가 사망하고 2017년 코엑스 에이랜드에서 환생한다니 달라이 라마 냄새도 나고 왠지 쇼핑에의 완벽한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는가.

하지만 오랜만에 찾은 코엑스 에이랜드는, 초대형 쇼핑몰의 안 좋은 리뉴얼 사례로 손꼽히는 모체를 모방해서인지 도무지 방문객으로 하여금 내부의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게 일부러 노력을 한 것처럼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매장을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 자체가 뚝 떨어져서 그렇게 열심히 보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내가 지나가면서 본 벨트라고는 버클이 링 모양으로 생긴 녀석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파의 벨트는 절대로 달라이 라마의 후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결론은 유니클로다. 사당 파스텔시티 지하 1층의 유니클로 매장을 방문한 나는 자연스럽게 남성 바지가 있는 코너를 찾았고 거기서 이 심플하고 튼튼해보이는 검정색 벨트를 찾아냈다. 벨트 제품은 환불이 안 된다는 매장 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뒤로 하고 29,000원에 후계자를 입양했다. 이번 포스트로 16번째 이 주의 소비를 올리고 있는데 앞으로는 무슨 이야기들을 써갈 수 있을지 큰 불안감을 느끼면서 나는 내일부터 새 벨트를 하고 출근을 할 것이다.

Related Posts

이 주의 소비: 와코 마리아 자켓

와코 마리아는 그 무시무시한 가격대와는 사뭇 안 어울리는 느낌으로, 두 명의 일본 축구선수 출신의 디렉터가 만든 브랜드다. 사실 이 브랜드에 대해 아는 것은 이 정도밖에 없고 상의 뒷판에 달린 특유의 예쁜 자수를 좋아했다. 여태까지는 그냥 좋아만 했다. 왜냐면 가격이 비싸거나 가격이 전혀 안 싸거나 가격이 저렴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는 일본에서 직접 구매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카드를 긁기 전에 한 번은 멈칫하게 되는 그런 브랜드. 와코 마리아는 내게 그런 브랜드였다.

이 주의 소비: 브레이킹 배드 시즌1

이직 후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시간을 채울 일이 필요했다. 지하철이 유일한 교통수단이라고 알던 시절에는 사당에서 선릉으로 이어지는 지옥의 2호선 구간 탓에 뭘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1500-2번 버스가 지하철보다 더 빠르고 쾌적하다는 것을 알고난 뒤 그 시간에 넷플릭스를 보기로 했다. 드라마라고는 거의 보지 않던 내가 지독히도 좋아하는 데이빗 핀처의 마인드헌터를 볼까 하다가, 별 이유없이, 불후의 명작이라 칭송 받는 브레이킹 배드를 나의 첫 넷플릭스 소비작으로 정했다. 지난 1주일 동안 출퇴근 시간, 회사에서 아침 먹는 시간, 점심을 먹지 않을 때 남는 시간 등을 알차게 활용하여 시즌1을 정주행했다. 역시는 역시 역시인 법인지라 굳이 나의 조악한 언어로 작품의 훌륭함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몰입해서 감상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작품에는 화학 이야기가 꾸준히 나온다. 화학... 화학...에 대해 생각을 하다보니 10년이 조금 넘은 과거의 언젠가가 떠올랐다.

이 주의 소비: 노선택과 소울소스 & 김율희 x 씽씽 조인트 콘서트

어느 날 뉴욕에 있는 친구 Y에게 메시지가 왔다. 꼭 이 공연을 가달라는 메시지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보니 NPR발 영상으로 한껏 화제가 되었던 씽씽이 라인업에 있었다. 출근길에 모바일로도 바로 결제를 할 수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출근해서 하는 모든 잡일은 다 돈 받으면서 하는 거라는 노예 근성을 발휘, 회사에서 결제를 마무리지었다. 나는 이 때까지만 해도 이 공연이 이미 예전에 매진이 되어 있었고 취소표가 풀릴 때만 예매를 할 수 있으며 그 취소표가 나오는 빈도가 가뭄에 콩 나듯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내가 엄청나게 우연한 기회를 잡았다는 것을 알았고 후훗 역시 나는 ⓛⓤⓒⓚⓨ한 시티보이지。。☆라고 자뻑에 빠졌다.

이 주의 소비: 다이슨 슈퍼소닉

올해도 어김없이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이 왔다. 매출액으로는 이미 중국의 광군제에 밀렸고 과거 해외 토픽 코너에서나 볼 법한 대규모의 텐트진과 개점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는 오프라인 매장의 광경을 찾아보긴 어려워졌지만 어쨌든 평소보다 꿀딜에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장점은 여전하다. 작년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에는 11월 뉴욕 여행으로 어려운 재정을 이어나감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마샬 액톤 앰프를 하나 샀다. 물론 그 대금은 지난 12개월의 이한결이 나눠서 냈지만 말이다.

이 주의 소비: 아디다스 스페지알 리버서블 자켓

살다 보니 패션이랑은 영 거리가 있는 사람 주제에 패션과 관련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제법 알게 되었다. 바이어, MD, 스타일리스트, 에디터, 디자이너 등 분야도 꽤 다양해서 귀동냥으로 전해듣는 소식과 지식이 적지 않다. 여러 사람과 그들로부터 들리는 여러 소식 중 뭐니뭐니해도 제일인 것은 G백화점의 L이 전해주는 세일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