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난한 사람들은 모자란 결정을 내릴까?


다소 자극적인 제목을 가진 글의 결론은(결론을 저 도발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 자체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가난 자체가 사람들에게 모자란 선택을 하게끔 강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은 그 사람의 됨됨이가 부족해서 오는 현상이 아니라, 그냥 현금이 부족한 상황 그 자체라는 말이다. (Poverty is not a lack of character. It’s a lack of cash.)

글은 1997년 새로운 카지노 시설을 갖게 된 체로키 부족의 사례로 시작한다. 카지노 시설과는 무관하게 94년부터 해당 지역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던 듀크대의 제인 코스텔로 교수 연구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 가난하게 자란 아이들이(특히나 체로키 부족 아이들)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행동장애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2) 카지노가 생긴 뒤로 수익 배당금이 부족에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체로키 부족 아이들이 행동장애 비율, 마약과 알콜 등과 관련된 청소년 범죄율이 모두 낮아지고 학교 성적은 높아져 해당 지역의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을 이루게 되었다. 3) 카지노 건설 10년 뒤 결과까지 보면 가난에서 벗어난 나이가 어릴수록 범법 행위를 저지를 비율이 극적으로 감소한다.

이런 연구 결과는 가난이 보통 개인의 문제에서 기인하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으로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라는 “일반적인”(글에서는 노골적으로 일반적이라고 표현하진 않았고 마가렛 대처가 가난을 “인격 결여(personality defect)”라고 했다는 것을 인용하며 세계 각국의 적잖은 정치인들이 예외없이 언급한 내용이라고 하고 있다.) 견해가 실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궁핍(scarcity)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프린스턴의 엘다 샤피어와 하버드의 센드힐 멀레네선 교수는 궁핍이 사람을 갉아먹고 다른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당장 오늘 저녁으로 뭘 먹지?”, “이번 주까지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같은 생각이 우리 정신이 수용할 수 있는 일정한 생각의 양을 차지하고 그것이 일상이 되면서 가난으로부터 숨 돌릴 여지도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쪼들리다보면 일반적으로 더 바람직하다고 보이는 결정에서 자연히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샤피어와 멀레네선은 GDP뿐만이 아니라 총 정신 수용량을(gross domestic mental bandwidth) 늘리는 것, 맥락에 맞춰 이야기하면 궁핍과 맞서 싸우는 것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가난 근절을 위해 정부가 돈을 쓰면 된다는 이야기지만 당연히 그럴 돈도 없을 뿐더러 복지에 관한 온갖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실현 가능한 답은 아니다. 경제적 상황을 보조하는 일종의 궁여지책(nudge를 우리말로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또는 교육 등을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혜택을 받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이 현실이다.

정도의 오픈 엔딩으로 끝나는 글을 읽으며 나는 지금 나의 궁핍한 현실을 생각하고 월급날은 며칠이나 남았는지, #렌딧 이벤트 당첨금은 언제 들어오는지, 몇 번의 술자리를 참아내야 하는지(이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등을 계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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