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서울시당 정치 스터디 클럽의 두 번째 교재로 읽은 책.

자유주의자이자 전직 정치인인 유시민의 정치적 관점을 전업작가 유시민의 유려한 필체로 써내려간 책이다. 유시민의 책은, 다시 말해 글은, 거의 처음으로 읽어보는데 왜들 그렇게 이 사람 책을 사서 보는지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문장이 깔끔하다. 평소에 어렴풋하게 생각하고 있던 주제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국가관의 하나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면서 정말 길지 않은 분량 안에 그의 핵심 주장(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쉽고 간단하게 요약해낸 것이다. 마르크스의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유시민의 서술이 얼마나 그의 이론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느낌상으로는 잘했을 것이라고 본다.

초반에는 현존하는 여러가지 입장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노력하는 듯하다가 후반부로 빠질수록 노골적으로 본인의 견지를 드러내며 독자들의 의식적 흐름을 본인의 입맛대로 끌고가려고 하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읽다가도 논조의 차이 때문에 약간 어색함을 느낄 수는 있겠다. 평소 유시민을 “좋아한다”거나 “존경한다”거나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 사람이 무슨 생각들을 거쳐와서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포퍼의 해석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의 방법론이 아니라 순수한 역사이론이다. 경제와 권력정치의 발전과정, 특히 미래 혁명의 진행과정을 예측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떻게 하면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지, 국가권력을 탈취한 이후 어떻게 사회를 재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킨 직후 레닌이 깨달은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는 실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그런 문제를 다룰 줄 아는 사회주의자는 찾기 힘들었다. 마르크스의 책에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배분하는 사회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사회라”라는, 아무 소용없는 슬로건 말고는 사회주의 경제에 관한 말이 한마디도 없었기 때문이다. 레닌이 집권 직후 실시했던 소위 신경제정책과 5개년 계획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소통한다. 합리적이든 아니든, 민중이 고귀하다고 여기는 어떤 말을 남이 독점하도록 허용하면 권력을 그들에게 넘겨줄 위험이 뒤따라온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지식인이 자기의 철학적 소신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은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당과 정치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현명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아니다. 게다가 애국심에 대한 르낭의 견해를 채택할 경우에는 애국심이라는 말을 굳이 기피할 필요도 없다. 애국심은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정당과 정치인은 국민들 속에서 이 의지를 북돋울 책무가 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주장이 있다.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하면 진보는 단결하는 능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다. 현존하는 지배적 사유습성을 지키는 보수주의는 익숙한 것을 수용하고 낯선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에 부합한다. 쉽게 단결하며 잘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져도 단시간에 수월하게 복원된다. 반면 진보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창조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운동이다. 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 그래서 쉽게 단결하지 못하며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열정과 신념이 무너지면 바람에 날리고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평생 진보주의자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어떤 것인가?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다. 인간의 완전성과 선을 전제하지 않고, 인간과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자기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때 얻게 될 “예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결과”를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껴안는, 그리고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결과로 책임지려는 태도이다. 이것이 반드시 칸트의 도덕법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제력을 가지고 일하는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때로 칸트의 도덕법을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세운 행위의 준칙이 아니라 단순한 ‘끌림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면서 ‘실용적 처세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다수 대중의 요구와 그들이 요구하는 행위의 준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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