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전개 과정 속에서 지독하게도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가 가지고 있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오로지 작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 그 자체에만 집중하게끔 만든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나는 그야말로 모래에 흠뻑 젖어 있는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몰입도가 강했다는 방증이겠다. 흡사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을 보고나서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시간은 뱀의 뱃살처럼, 깊은 주름을 그리며 몇 겹으로 접혀 있었다. 그 하나 하나에 들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더구나 그 주름 하나마다, 모든 형태의 의혹이 제각각의 무기를 숨기고 있다. 그 의혹과 논쟁하고 묵살하고 또는 돌파하여 나아가려면 어지간한 노력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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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밭일기, 이유근

아버지가 책을 한 권 쓰셨다. 지금의 제법 멋드러진 주택이 들어서기 이전, 남양주 수동의 작은 땅에서 보낸 시간을 담아낸 책이다. 지난 주부터 짬을 내어 책을 읽었다. 2010 년 봄부터 2013 년 겨울까지의 이야기였다. 유럽 여행을 다녀와 용산에서 카투사로 복무하고, 전역 후 복학 준비를 하고 나름 성공적인 한 학기를 보내기까지의 기간이다. 당시의 나는 여러모로 모가 나고 굴곡이 심한 사람이었다. 잠깐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나의 언행 때문에 한숨이 나오는 기억이 한둘이 아니다. 당연히 부모와의 마찰도 심했다(고 본다).

피로사회, 한병철

문화 힙스터라면 이미 한 번쯤 읽어봤을 정도로 출간된 지 수 년이 되어가는 책인 만큼, <피로사회>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 피로사회라는 구조 자체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우리들에게는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식상함은, 이 사회가 흘러온 역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 다뤄질 담론을 무려 2010년에 지적해낸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의 방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