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를 비우고 아무런 생각없이 청산유수처럼 읽어내려갔던 책. 생각이 없었던 것은 그저 피상적인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것 이상으로 나만의 사고를 할 수가 없었던 탓인데 작품 해설을 보고 나서 저것이 나의 사고력이나 상상력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주의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래는 도무지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던 부분에서 발췌.

유럽 여자, 똑똑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교양 있는 여자, 국제정치에 관해 지식이 있는 여자, 마르크스주의를 아는 여자,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여자, 예리한 질문으로 남자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여자, 청렴 결백한 여자, 고상한 취미를 가진 여자, 경우에 맞게 옷을 우아하게 입는 여자, 젊지만 동시에 성숙한 여자, 술 문화를 잘 아는 여자, 적절한 요리를 선택할 줄 아는 여자, 경우에 맞게 포도주를 주문할 줄 아는 여자, 자기 집에서 손님을 접대할 줄 아는 여자, 하인을 부릴 줄 아는 여자, 침착하고 다정한 여자, 욕망을 자극하는 여자,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유럽 여자, 라틴 아메리카 혁명가를 높이 평가하는 유럽 여자, 하지만 식민화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문제보다 파리의 시내 교통을 더 걱정하는 여자, 매력적인 여자, 누가 죽었다는 소식 앞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여자 (후략)

Related Posts

산밭일기, 이유근

아버지가 책을 한 권 쓰셨다. 지금의 제법 멋드러진 주택이 들어서기 이전, 남양주 수동의 작은 땅에서 보낸 시간을 담아낸 책이다. 지난 주부터 짬을 내어 책을 읽었다. 2010 년 봄부터 2013 년 겨울까지의 이야기였다. 유럽 여행을 다녀와 용산에서 카투사로 복무하고, 전역 후 복학 준비를 하고 나름 성공적인 한 학기를 보내기까지의 기간이다. 당시의 나는 여러모로 모가 나고 굴곡이 심한 사람이었다. 잠깐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나의 언행 때문에 한숨이 나오는 기억이 한둘이 아니다. 당연히 부모와의 마찰도 심했다(고 본다).

피로사회, 한병철

문화 힙스터라면 이미 한 번쯤 읽어봤을 정도로 출간된 지 수 년이 되어가는 책인 만큼, <피로사회>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 피로사회라는 구조 자체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우리들에게는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식상함은, 이 사회가 흘러온 역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 다뤄질 담론을 무려 2010년에 지적해낸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의 방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