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서머싯 몸의 작품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제목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그의 책 하나를 집어들었다. 퇴근하고 침대에 엎드려 책을 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책 제목에 신경을 하나도 쓰지 않아서인지, 제목이 눈에 들어왔더라도 워낙에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번역이 되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책의 내용이 에드워드 노튼과 나오미 왓츠가 열연한 영화 «페인티드 베일»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이 영화의 원작인가 싶어서 잠시 읽기를 멈추고 책 표지를 봤는데 아뿔싸, 인생의 베일이라고 번역된 책의 원제가 “The Painted Veil”인 것이 아닌가. 로맨스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나름 자신 있게 제시할 수 있는 영화로 «페인티드 베일»을 꼽는 나는 이 시점부터 급속도로 책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해서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서머싯 몸의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지 원작의 메시지를 오롯이 살려낸 영화는 아니다. 영화가 독특한 설정과 이국적인 배경, 평면적인 캐릭터를 바탕으로 로맨스 장르를 충실하게 완성해냈다면 소설은 주인공 키티 가스틴을 중심으로 이성과 감성의 괴리, 그로 인한 인간의 불완전함과 어리석음,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일종의 관용과 성장 등 대단히 인간적인 가치관을 가감없이 담아낸 이야기다. 영화를 무척 감명깊게 봤던 탓에 책을 읽어가는 동안 분명히 작가의 의도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의 마음은 자꾸 영화의 분위기와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아주 적절한 구절이란 아래와 같은 것이렷다.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부인의 남편이 저희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의지가 되는지 부인께선 알지 못하실 겁니다. 하늘이 저희에게 선생님을 보내셨습니다. 부인께서 선생님과 같이 오셔서 기쁩니다. 선생님이 집에 돌아갈 때면 부인의 사랑과 부인의…… 부인의 어여쁜 얼굴이 거기 있다는 게 커다란 위안이 될 테니까요. 선생님을 잘 돌봐 주시고 그분이 과로하지 않도록 해 주세요. 저희 모드를 위해서라도 선생님을 돌봐 주세요.”

조제프 수녀가 돌아서서 문을 닫았고 키티는 가마에 올랐다. 그들은 좁고 구불거리는 거리를 되돌아갔다. 워딩턴이 일상적인 말을 건넸지만 키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가마의 휘장이 내려져 있어서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침묵 속에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들이 강에 도착해서 그녀가 가마에서 내렸을 때 그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얼굴에 주름이 지면서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그녀가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어리석음 때문이에요.”

그러나 나처럼 영화의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를 먼저 접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소설의 뒷부분을 읽으면서, 또는 주인공 키티 페인의(가스틴은 결혼 전의 성이요, 페인은 월터 페인과의 결혼 이후의 성이다.) 감정 상태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다. 단언컨대 그 찝찝함을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1번 사랑에 대한 인식을 놓고 큰 수의 법칙에 준할 만한 모수의 사람들로 정규 분포를 그렸을 때 저 쪽, 즉 진정한 사랑은 원 앤드 온리라고 주장하는 방향으로 식스시그마 정도에 속하는 극도로 희귀한 사람이거나, 2번 씹선비거나, 3번 내로남불형의 옹졸한 인간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무결한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삶 역시 옳은 선택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정하는 기준 역시 판단자의 주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서머싯 몸은 키티의 불완전성을 통해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를 “완성”했다. 좋은 독서였다.

월터를 경멸했던 자신이 이제 경멸스러웠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분명 알면서도 자신에 대한 그녀의 평가를 비통함 없이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바보는 그녀였다.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녀는 그를 혐오하지도 그에게 분노를 느끼지도 않았지만 약간의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꼈다. 그가 뛰어난 자질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게 이상하고도 거북스러운 위대함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가끔 들곤 했다. 그래도 그녀는 그를 사랑할 수 없었고, 무가치한 인간임이 명백하게 밝혀진 다른 남자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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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니엘 호손 단편선

초기 작품들을 봤을 때는 미 동부의 자연주의와 신비주의, 인간의 태생적 숙명과 종교적 굴레, 미신과 네이티브 어메리칸 등의 소재가 한데 뒤섞인 풍의 이야기만 주구장창 이어지는 듯했으나 후기의 작품으로 갈수록 사회와 풍자, 기계 문명과 과학 등의 이야기로 번져가는 것을 보며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이구나 했는데 뒤에 옮긴이의 평을 읽어보니 이 모든 작품이 사실상 하나의 궤로 묶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다시, 헌법, 차병직, 윤재왕, 윤지영

그러니까 재미없는 총평을 하자면 그야말로 무난한 교양서적.